한반도의 육지와 바다는 뚫려 있었다.

역사 2008. 12. 4. 11:34
지난 11월 21일에 동료 교수님들하고, 수로왕릉, 봉황대, 김해패총, 구지봉, 허왕후릉, 김해 박물관을 구경하였다.  금관가야의 시기이니 아마도 0년정도에서 500년사이에 발생한 사건일 것이다.  특히 허왕후는 현재 인도의 부처가 태어난 곳과 가까운 지역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직접 오기보다는 당시에 금관가야가 장악하고 있던 해상중 하나의 지역에서 상호간에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혼인 정치를 펼쳤을 것으로 해석된다.  금관가야는 아마도 인구 5만정도를 거느리는 해상 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유적을 보면 나온다.  따라서 금관가야가 거래했던 해상의 범위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현대 또 다른 학설은 중국 남부에 인도에서 넘어와 마을을 이루어 살던 족이 있었고, 이들이 해상으로 진출하여(현재의 중국 광주 정도) 금관가야와 교루하지 않았나 싶다.  전혀 거래 없던 인도와 혼인 정치를 펼칠 가능성은 적지 않은가 싶다.
금관가야도 실은 북방에서 밀려온 부족들이 만들은 세력이라고 볼 수있다.  당시는 북방의 스키타이족이 문화적으로 앞서있었고, 중국의 문물도 어느정도는 북방을 통해 들어 왔기때문에, 북방의 부족들이 중국의 압력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 남동부, 이어서 일본 큐슈나, 혼슈 남부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산동반도 쪽은 한반도의 서해안과 교류를 많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북방민족의 이동, 이들이 일본 규슈, 혼슈 남부까지 진출하고, 여기에 일본영토와 한반도내의 국가간 연합, 더 나아가 해상을 중심으로 한 교역과 상호 정복 등을 이해하여야 삼국시대, 더 나아가 통일 삼국시대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일본과 한국의 문명을 비교하면서 언제부터 일본이 한국을 앞서기 시작하였는가와 같은 치졸한 비교를 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런 문제에 대해 대부분 인정하는 것은 적어도 400-500년경까지는 한반도의 문명이 일본 열도보다는 우세하였고, 이후는 독자적인 발달을 하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백제가 망할때 일본이 도와주었다는 점, 백제의 후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왕손을 이루었다는 점, 고구려가 가야와 연맹하기도 하고, 일본과 연맹하기도 한 점, 신라도 때로는 일본, 고구려, 가야, 백제 등과 연합과 갈등을 끊없이 계속하였다는 점은 당시의 대외정책이 믿을 수있는 연맹을 구축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을 말하기도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 일본, 한반도는 상호 각축을 벌이는 지리적인 공간일 뿐이자, 여기에 한민족이나, 일본족이나, 중국족이라는 관념이나, 이런 관념에 기초한 국가는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요즘 지구화나 국제화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신라의 혜초를 비롯하여 혜초이전의 사람들도 당나라나, 수나라 등을 통하여 또는 바다를 건너, 중앙아시아 고원을 넘어 인도에 유학가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혜초는 삼년정도 걸린 모양이다.  아무튼 당시에도 바닷길과 육지 길 모두 상당히 자유로이 뚫려 있었다는 점을 알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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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이동이 로마 제국을 허물고, 근대 유럽의 기반을 만든다.

역사 2008. 12. 4. 11:04

유럽의 역사에서 기원후 1천년간은 지중해가 중심이었다.  즉 로마제국이 유럽의 거의 전역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스페인 반도 지역을, 간접적으로는 유럽 중동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한나라가 흉노족을 압박하고, 흉노족은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서부에 영역을 틀고 있던 세력들을 더 서쪽으로 지금의 유럽 대륙으로 몰아붙였다.  물론 이전에 이미 상당수의 유럽 북부의 세력들이 유럽 남부와 동부로 이동하여 그들의 세력범위를 넓혔었다.
중국의 힘이 느껴진다.  대개 역사학자들은 서기 1300년경 이전에는 중국이 일인당 국내 생산액이 유럽보다 높았었다고 지적한다.  중국이 유럽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움직임에 의해 유럽이 재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리 신기할 것 까지는 없다.  다만 문제는 로마제국이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에 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소수인이 상당한 정도의 변경을 가진 곳에 군대를 배치시키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방어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당시의 군대는 초기에는 로마인들로만 구성되었으나, 이후에는 호전적인 게르만 민족이나 다른 민족을 사용하여 군대를 편성하거나, 아니면 피지배민족중에서도 군대에 편입시키게 된다.  이들 무장한 이민족들은 서서히 부족 의식이 깨우치게 되면서, 서서히 각성하여 로마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자라난다.  자라난다고 표현한 것은 하루 아침에 부족들이 단결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에는 부족간의 다툼이 심하여 단결이 되지 않고, 오히려 로마의 분열정책에 휩쓸리게 되지만, 상당한 시간이 지난후에, 아니면 몇몇 부족들은 계기를 만나고, 위대한 지도자들을 만나면 부족들이 힘을 합쳐 로마에 저항하게 된다.
로마의 자체 군대들도 월급제로서 운영되고, 심지어는 튀직후에는 연금을 주는 식으로 보상을 약속하지만, 초기에는 어느정도 문제가 없지만, 로마에 와서 정착하는 군대들이 늘고, 자신들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정치적인 세력으로 바뀌면서 로마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로마의 정치인들은 이들 군대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도 하고, 군대들은 로마에 들어와 변경의 땅들을 빼앗아 차지하고 이곳에서 살기도 한다.  이럴 경우에는 원래거주하던 이들과 분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튼 로마는 서서히 로마인들이 누리던 식민지의 혜택을 누리던 관료조직, 공화적인 정치체제, 군대의 와해 등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
이 자리에 북방에서 내려온 야만족들이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고, 부족별로 새로운 국가건설을 시작하게 된다.  현재의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러시아 등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수많은 부족들이 남, 동으로 내려와서 정착하게 되었고, 이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는가에 있다.  학자들은 이들이 인구를 증가시키는 가족제도를 가지고있었고, 식량이나, 경제적인 부양을 위해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부족끼리 싸우는 것이 아닌, 부족을 나누어서 일부는 이동하여 정착하도록 하는 제도적인 상호 부조의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나는 젊은이들이여 해외로 나가라는 이명박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미네르바가 말했다는 한국은 끝났어 영어배워서 빨리 한국을 탈출하라는 말과 중복되면서, 다른 한편 200-300년경에 북구 유럽의 민족들이 민족이동이 가능하게된 제도를 생각하게 된다.  민족이동이나 해외로의 진출은 자국의 사정이 좋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고통과 기회를 공유 분담할 수 있는 체제가 있을 때 제대로 기능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한국이 싫어서 나가든, 진취적인 기상을 갖고 있어서 나가든, 한국내 공동체적인 진단과 대안이 있을 때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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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의 교류는 자유로왔다.

역사/BC 2008. 11. 15. 13:17
역사서술 이전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한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아마도 삼국 초기 이전단계는 거의 선사시대에 속한다.
그리스의 경우에는 BC700년경부터 역사시대라고 칭할 수있을 지 모르지만.
선사시대에 대한 역사 해석은 순전히 발굴된 유물과, 드문드문 남은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들, 아니면 민담으로 전해내려오는 설화, 기록된 설화 들을 보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도의 시기에 이르르면 같은 땅에 살았다는 것 외에 나와 같은 핏줄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모호해 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선사시대에는 국경선 통제가 거의 없었고, 아니 국경선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한반도의 경우에는 국경선 내에 주민들을 가두어 놓는 주민등록제도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국경선의 개념이 없이 자유롭게 필요에 따라 이동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있다.  또한 정착식 농업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는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이동하고, 기후에 따라 이동하고, 수렵과 채취를 곁들인 생활이었다면 당연히 이동을 전제로 자시의 삶을 꾸렸을 것이다.

이동의 범위가 어느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의 유물, 벽화의 비슷함, 다른 지역의 산물이 이동하여 나오는 정도 등을 파악한다면 일본의 큐슈지역은 가야에 해당하는 지역고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중국의 산동반도는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인근의 섬들과 이동이 많았을 것이고, 중국의 요서지방은 요동을 거쳐 대동강변까지, 아니 더 나아가 울산지역까지도 비슷한 바위에 새겨진 조각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동은 대규모로 정치나, 기후상의 변화로 인해 발생했을 것이다. 단순히 한 부족 단위로 경제를 위해 이동하는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선사시대의 주민들은 국경의 거리낌이 현재보다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보다 이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우리는 이동의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이동할 때마다 국적을 의식하고, 강요당하고, 민족의식을 재현하는 각종 인공건조물에 세뇌당하고, 따라서 우리는 좁은 영토주의에 사로 잡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히려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좁은 영토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을 것이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는 한층 cosmopolitan 적인 사고와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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