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연설의 특징

역사/1930- 2013. 2. 9. 15:37

(1) 작은 거짓보다는 큰 거짓을 말하라.

거짓을 말한다면, 큰 거짓을 말하라. 큰 거짓은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것보다, 더 깊은 심연에 있는 감정적 성격에서 소화될 것이기에, 더 큰 확신의 힘을 갖고 있다. 커다랗고 자명한 거짓은 기억에 남으면서도, 거짓일까 의심하기가 어렵고, 그런 것을 거짓으로 날조했을까 의심하기도 어려워 진다.

(2) 잘못을 인정하지 말아라.

  주저하지 말라, 말한 것을 덧붙이지 마라, 절대로 다른 편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마라, 모든 것을 흑백으로 구분하여 대조시켜라”. 이것이 바로 모든 종류의 선거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이다: 체계적으로 다루는 문제를 한편으로 치우치게 하라. 적에 대해 굽힘없이 공격할 때는,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자에게 정의가 간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게 된다. 공격을 중간에서 멈출 때는 성공을 하기 어렵다. 이는 대중들이 자신의 말이 정의로운 것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다“ (Bullock, 1952: 3).

  (3) 모호하게 반복하라.

  다양한 표현이 서로 중첩해서 나타나 더욱 모호해진 내용은 대중을 현혹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히틀러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기보다 특정 부분을 반복적으로 표현해 청중의 머리에 주입시키려 했다” (김종영, 2010: x).

  1932년말 뮌헨의 오스트리아 총영사가 히틀러에 대해 오스트리아 총리에게 보고한 내용: 그는 선전할 때 우선 부정적이고 비판적 측면이 강조되도록 조절하고, 긍정적 측면은 윤곽만 제시해서, 그 계획이나 약속의 실행 가능성을 전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불만 있는 다수를 끌어 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김종영, 2010: 55).

  단순반복의 효과, “”예컨대 청중이 동일한 내용을 한 세 번쯤 듣게 되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네 번째 들을 때는 벌써 생각하기 시작한다. 연사가 말하는 것이 청중자신이 이미 오랫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하고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말이다“ (김종영, 2010: 30).

 

  히틀러에 당하지 않으려면

  (1) 수사와 논리의 훈련을 받아라.

  언어와 사고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히틀러의 연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몸서리치거나 웃으면서 피할 것이다 (Olden, 1981, Hitler: 84).

  (2) 자극적인 것만 찾지 말고 스스로 미래의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

  왜 대중은 히틀러를 지도자로 여겼는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은 자극적인 에너지에 눈이 멀었고, 나이든 지식인들은 더 이상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를 갖지 못하고, 결국은 과거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더욱 보수화했다” (Heiden, 1936, Adolf Hitler: 94).

  (3)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나 히틀러의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범죄국가가 정의와 불의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면, 어느 누구나 피해를 입게 된다. 인간의 본성 자체는 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 늑대가 되는 데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치 않다.....우리 속에 아이히만과 같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이히만과 같은 본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더 늦기 전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더욱 필요하다.... 인간 사회에 기반을 둔 명확한 규범으로 통치하는 그런 국가만이 역사의 정의가 불의로 바뀌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크놉, 1998/2011: 28).

 

참고 문헌

Bullock, Alan, 1952, Hitler: A Study in Tyranny, New York의 축약된 것이 John L. Snelled., 1959, The Nazi Revolution: Germany’s Guilt or Germany’s Fate?, Boston, D.C. Heath and Company: 1-8에 수록된 것을 참조

Knopp, Guido, 1998/2011,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서울, 울력

김종영, 2010, [히틀러의 수사학] 서울, 커뮤니케이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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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희생 하에 나타난 독재와 산업화: 1930년대 경성방직의 사례

역사/1930- 2013. 2. 7. 17:11

  1930년대는 세계적으로 불황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경성방직은 오히려 생산을 늘리고, 매출이 증가하였다. 이 이유에 대해 경방에서 출판된 역사책 (주식회사 경방, 1980, [경방 60: 1919-1979])에서는 애국적 소비를 우선 들고 있다. “경방은 또 영업정책에 있어서도 민족주의를 유리하게 도입했다. 특히, 시장개척에 있어서 조선인은 조선인의 광목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민족기업의 육성을 호소했던 것이다” (조기준, 1973, [한국기업가사], 박영사: 262). 특히 (1) 관서, 관북지방과 만주지역에서의 애국적 소비를 들고 있다. 관서와 관북은 근대 문물의 영향을 일찍 받았고, 민족 저항운동이 강하면서, 또한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조선방직 (일본인 기업, 공장은 부산 소재)의 제품이 남부지방을 점거함에 비추어, 경방제품은 경기이북 특히 선천 등지를 중심한 평안도로 진출했다. 이것은 관북지방에 일찍부터 뿌리박고 있는 민족주의에 호소하여 시장개척을 기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경방이 북관지방의 시장개척에 관심을 둔 것은 뒤에 경방이 만주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방의 제품이 견고하고 둔중하였다는 점은 만주시장의 개척을 용이하게 하였다” (조기준, 1973: 264-65). 이런 지역에서 애국적 소비가 발생하였다. 또한 (2) 당시의 조선 물산진흥운동, (3) 일제 수입품이나, 일본기업인 조선방직의 제품보다는 민족자본인 경성방직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 풍토가 작용하였다. (4) 또한 경성방직의 입장에서는 만주의 중국인들이 19312월에 발생한 칠보산 사건시에 경방이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하고, 만주의 중국인들이 항일의 감정으로 인해 경방의 제품을 많이 구입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경방, 1980: 90).

두 번째로, 애국적 소비 외에도, 불황기에 저가품을 선호하는 경향도 한 몫을 차지하였다. 즉 품질은 떨어지지만, 내구성과 가격 면에서 저렴한 제품을 선호하는 만주지역, 북한 지역의 주민들의 소비 성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에 농민들은 곡가 하락, 곡물검사의 국가이관 (1932. 10), 면화의 지정공판 (1933. 3), 농민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었고, 공업 분야도 제조업의 불황에 따라 임금이 삭감되는 상황에 처했다.

세 번째로, 중국내부의 생산의 붕괴로 공급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시작하자, 중국 내부의 면방업계가 생산을 못하게 되자, 이미 만주에서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던 경성방직의 제품들이 판매가 호조를 띄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의 산업들은 거의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특히 우리 경방과 같은 업종인 중국 방적공업은 그야말로 정지상태를 면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중국의 북방인 만주에서 평판이 좋았던 경방제품인 不老草標는 곧 화북지방으로 퍼지게 되었다” (경방, 1980: 100).

 경성방직은 1939년에 중국 만주 소가둔에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한국민족기업 최초로 해외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고 조기준은 서술하고 있다. “1939년에는 자본금 1천만 원 (본회사 전액 인수)이 전액 불입된 남만주방적회사를 만주 소가둔에 설치하고, 이미 개척한 만주내의 판로를 확보함으로써 한국 산업의 국외진출을 실현시켰다” (조기준, 1973: 260). 경성방직에서 스스로 서술한 역사에도 이점을 강조하듯, 소제목으로 만주사변과 경방의 발전” (경방, 1980: 88- ), “청년기로 접어든 경방과 만주 진출” (경방, 1980: 103)을 달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1936년 애초에 국내 시흥에다 공장을 세우려는 계획을, 총독부의 권유로 만주에 세우기로 결정한다. “불로초(광목 상표)에 대한 인기가 (만주에서) 날로 높아감에 따라 그에 대한 수송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만주에다 공장을 세울 것 같으면 이 문제도 아주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었다” (경방, 1980: 105). 그 허가를 내린 것은 1937918일이었고, 애초에 중국 통천을 고려하였으나, 전장지역이라, 보류하고, 당시에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지역에 중국인 자본과 같이 하려 하였으나, 일본 특무기관에서 거부하였다. ”1939년에 만주 蘇家屯에다 공장을 짓기로 하고, 그곳에 27만 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하였다. 소가둔은 만주의 교통요충지로서 봉천 조금 못미처 있는 넓은 들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방, 1980: 106). 남만 방적 주식회사가 그것이고, 1942년에 생산을 시작하고, 1943년에 남만 방적이 본 궤도에 올랐다고 전한다.

  번역을 시도하였으나, 되지 않은 Eckert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경성방직의 역사를 탐구한 뒤에 소위 식민지 유산에 대해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Carter Joel Eckert, 1986,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the Koch’ang Kims and the Kyongsong Spinning and Weaving Company, 1876-1945, Ph. D. Dissertation Thesis, University of Washington, U. S.). Eckert가 박사학위를 쓰던 시점에서도 역시 한국은 민족자본가에 의한 발전이 이룩됨과 동시에 독재정치체제가 발달했던 나라이다. 이런 점은 대개의 경우, 민족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체제를 선호하였던 서구의 역사적 경험과 상치되었기에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Eckert는 민족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식민주의적인 유산이 더 풍부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의 부루주아지는 해방직전에 정치적으로 취약했고, 비민주적인 세력이었다. 이는 부르주아지가 지주계급과 합세해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특수상황이 있었다. 서구의 경우에는 지주계급과 상공인세력이 투쟁을 하면, 상공인 계급이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취해 민주주의가 발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투쟁이 없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지주계급과 상공세력이 하나의 뿌리였기에 상호 투쟁할 상황이 아니었다” (Eckert, 1986: 538). 물론 조선 후기, 특히 개항기에 조선에도 상당한 수의 상인들이 존재했고, 이들 중 관과 유탁한 상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상인 계급이 산업자본가로 이동한 경우도 있었음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조기준, 1973). 그러나 아무튼 Eckert의 논리는 따르면, “이런 상황은 조선을 일본 산업자본의 시장과 식량기지로 이용했던 일본의 정책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토착 자본의 산업화도 일본의 자본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지, 자체 자본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경성방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Eckert, 1986: 539). “한국의 정치는 결국 지주와 상공자본가에 투쟁에 의한 내부적으로 결정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일본의 침입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Eckert, 1986: 539)고 강조하고 있다.

  국가- 산업활동과의 관계가 식민지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어 사회적으로 작동하였기에 산업가들은 독재체제에서도 오히려 편안하게 자본주의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Eckert의 논리를 따르면, “이는 결국 국가-비지니스와 관계를 결정짓기도 했지만, 정치의 형태도 결정지었다. 총독부 독재 정치체제라는 것은 일본과 조선시대의 정치형태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의 식민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에서 만들어진 정치체제이다. 이는 서구의 부르주아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한국의 부르주아는 독재체제에서 국가의 협력을 받아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게 되는 특이성을 보이게 되었다. 일제는 토착자본가들을 식민지 산업화에 동참시킴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착취만이 아니라, 한국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차단하는 데에도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Eckert, 1986: 541). 이에 이르면 경성방직의 경우에 민족자본가로서 교육사업에 참여하였거나, 민족적인 정서에 의존하여 사업이 팽창하였다는 주장에 반하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행위자의 문제로서보다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구조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토착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토대가 민족주의에서 멀어지면 질수록, 총독부의 독재 권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경험은 독재가 자본축적에 편안한 정치적 모델이 되었고, 경제적 민족적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한국 부루주아지의 생존을 위해 독재가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독재와 결합하여 자본주의적 사업이 성공한 것은 결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희생 위에 탄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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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식민지 조선 경험

역사/1930- 2013. 2. 6. 13:42

요즘 서울에 가보면, 남대문 시장과 명동에 일본인 관광객이 넘쳐나고, 옛 소공동 인근의 카페에는 중국인들만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다. 물론 북촌에도 일본과 중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있다. 현재 일본과 중국인 관광객들의 접근을 보면, 명확하게 식민지 시절 일본인 이 장악한 명동과 인근, 그리고 중국인들이 조선 말기에 장악했던 소공동 지역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역사의 끈질김을 느끼고 있다.

지난 주말에 하야시 히로시게 (1940년 충남 부여 출생), 2004/2007, [미나키이 백화점 三中井百貨店: 조선을 석권한 오우미 상인의 흥망성쇠와 식민지 조선] (논형),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1940,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일본의 멸망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이다. 그는 39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당시의 느낌을 몸에 전류가 흐르듯, ‘그래, 내가 오랫동안 와 보고 싶었던 곳이 이곳이었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xi)고 표현하고 있다. 어릴 때 계산하자만 5살 미만시절의 경험이 그의 생애 경험의 원형질이 되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얼음이 언 강에서 스케이트를 즐겼다. 그 당시의 추억과 모습들이 마음속 깊이 숨 쉬고 있다” (5). ”같이 하천에서 물놀이를 했던 인근의 조선인 아이들은 당시 나와 함께 용기나 모험심을 경쟁하며 싸움이나 나무타기, 시장에서 참외 훔치기 등을 똑 같이 경험한 친구들이다” (253). 따라서 자신을 해방후 한국에서 일제 침략을 전제로 자신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 자신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다면, 당시에 거주했던 최대 75만 명의 일본인 전체 (조선에 거주했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침략자가 되고, 자신의 가족도 침cirwk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자신도 침략자의 2세가 되는 셈이다. “물론 우리 가족의 조선 생활도 침략이고 수탈이었다는 것이 된다. 아버지가 금강에 제방을 쌓기 위해 설계기사로 조선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나는 침략자의 2세로 분류된다” (253). 너무 억울하다. 그토록 조선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던 그에게 침략자라니! 내가 보기에도 그가 더구나 5세 미만의 아이가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조선인들을 억압하고, 수탈하였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의 아버지도, 금강에 제방을 쌓기 위해 온 설계사인데, 그리고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조선인을 억압하거나 수탈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그는 조선인들이 스스로 일본인화하였다고 주장한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지만, 유추해 표현하자면 쇼와 15년간 (1926-40년 정도)은 특히 급속히 조선이 일본 적응화, 조선인이 일본인 적응화됐다고 말할 수 있다” (133). 그 증거로 책의 제목에 나타난 일본인이 세운 백화점에 조선인들이 많이 이용하고, 더 나아가 자부심을 갖고 이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1935년 무렵, “백화점의 경영, 마케팅 형태는 일본식이었고, 판매하는 상품은 조선의 특산품 (고려인삼)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상품들이 일본제품이었고, 고객층의 60-70% 이상은 조선인이었다. 1935년대의 경성인구는 60-1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일본인은 13-15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고객 대상을 일본인으로 한정해 생각했다면 일본인이 경영하는 4개의 백화점 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조선인은 일본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일본 상품을 좋아했다. 특히 미쓰코시 브랜드의 명성은 조선인 사이에서도 일본인만큼이나 선호했다” (13-14). 저자는 더 나아가 지나친 일본화에 대해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덧붙인다. 두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우선 구로다 가쓰히로 黑田勝弘의 [한국인의 역사관] (문예춘추)을 인용한다. “한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인이 조선에 일시 귀국하여, 1944년 경성의 한국인 거리였던 종로의 영화관에 들어갔더니, 뉴스영화시간에 상영되는 일본군 전황에 관한 뉴스를 접하면서 관객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도쿄의 영화관조차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162). 그리고 본인이 수집한 증언도 이에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조선의 많은 청소년들이 점차 일본인으로 되어 갔다는 증언이며, 내가 수집한 증언과 완전히 일치한다. 일본인이 많았던 혼마치 거리 주변이나 조선인이 많았던 종로 주변의 영화관 안에서 같은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163). 불편한 사실이지만, 그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피지배자는 강자의 논리를 더욱 강하게 주장하여야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기에 대부분의 이데올로그들은 당시의 이데올리기의 희생자를 곁에 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모두 근거가 있고, 사실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 개인적인 경험의 수준에서 침략을 억압과 수탈이라고 규정한다고 해서, 국가나 경제시스템에 의한 침략을 무시할 수 있을까? 개인과 국가나 경제 시스템의 관계가 그토록 개인들의 의도나 선호도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면 1차원적 사고일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물론 체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만과 비교하여, 조선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은 1895년에 청일전쟁 승리의 댓가로 대만을 병합한다. “대만에서는 조선과 달리 식민지 전체기간을 통해 현지의 대만상인 세력이 굉장히 강했고, 일본인 상인이 성공한 사례를 드물었다. 일본인 거주자가 이용했던 소매업은 압도적으로 대만인이 경영하던 점포가 많았다. 일본인이 찾는 일본 상품은 대만인 상인이 독자적으로 일본에서 서플라이체인(공급자 조직)을 구성하여 공급판매했다” (42). 즉 조선과는 달리, 대만의 상인들은 이미 자체적으로 일본의 거래상품들을 대만에 공급 판매하는 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대만만하여도, 이미 16세기 이래 화란이나 포르투갈 등과 일찍이 교역을 하였고, 중국대륙에서도 무역을 위해 이곳에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일본은 대만 침략 당시에 일본은 중계무역에 종사하였고, 아직 자신만의 공산품이 발달하기 이전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병합하고, 본격적으로 상품 무역으로 진출하는 1920년대에는 일본의 산업제조업은 생활필수품을 충분히 제조하여 한국으로 수출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상업 조직망 이전에 제조업의 발달의 수준이 달랐던 시기였다. 상업 조직의 경우에도 조선의 경우에도 객주, 보부상, 시전 상인등으로 이어지는 상당한 수준의 상조직이 전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초기에 상조직들이 강력하게 반일 운동을 벌인 경력이 있었다.

저자의 두 번째 설명은 일본이 만주에 진출함으로써 조선이 일본본토, 조선반도, 만주를 잇는 중간 거점으로 기능하기 위해 군수물자나 관용물자, 그리고 만주로의 무역의 중간지점으로 기능하였음을 주장한다. 이 주장은 상당한 정도 타당하다. 일본이 한국을 원료와 식량공급기지에서 공업제조기지로 전환하는 시점이 바로 1932년경, 만주국의 설립과 동시에 이루어지기에 그렇다. “혼마치 상점가는 1910년 전후부터 일본인 상점가로 꾸준히 성장했으며, 상점 반수가까이가 1926년 이전에 개업했다. 그리고 1932년 만주국 건국을 기점으로 개업이 가속화됐다. 이 시기에 전체의 40% 정고가 신규 개업해 한층 짜임새 있는 상점가가 형성되었다” (156). “그러나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건국과 일본, 만주, 중국의 블록화 형성정책을 계기로 만주를 염두에 두고 병참기지화 되면서, 조선에는 1932년부터 일본의 많은 대기업이 진출했다” (174-75).

필자는 나이 64세에 책이 발간된 것으로 보아, 60세 전후의 인생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저자는 컨설턴트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지식인에 속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한국인과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한국 기업인들의 태도를 평가하면서 의리가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이용가치가 있는 대상은 중요하게 생각해 교제하다가도, 그것이 지나면 살짝 손을 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기업이 일본기업과 제휴하고 그것을 끝낼 때의 전형적인 패턴 중 하나다” (172).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경제적인 또는 인간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표현은 없어서 문맥만으로 보면, 한국 기업인은 자신의 이익만 좇는 냉혈한으로 이해된다. 한국사에 대한 이해의 불편한 점은 일본이 한국에서 식량을 수탈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 현재 한국에서 상식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일본인은 조선인을 기아로 몰았고 쌀을 수탈했다고 하는 결론은 이 데이터를 근거해 봤을 때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조선인이 기아상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조선의 식량을 일본으로 계속 송촐했다고 하는 주장도 생각하기 어렵다” (176). 조선의 일본 기업이 조선의 식량을 일본으로 수출했고, 대신 만주의 곡물을 조선에서 수입했다는 통계치에 의거하여 전문가들은 주장하는 데,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대지 않고, 인구와 식량 통계를 근거로 한국의 식량이 부족한데, 어떻게 일본으로 수출하였겠느냐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조금 안타까운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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