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식민지 조선 경험

역사/1930- 2013. 2. 6. 13:42

요즘 서울에 가보면, 남대문 시장과 명동에 일본인 관광객이 넘쳐나고, 옛 소공동 인근의 카페에는 중국인들만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다. 물론 북촌에도 일본과 중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있다. 현재 일본과 중국인 관광객들의 접근을 보면, 명확하게 식민지 시절 일본인 이 장악한 명동과 인근, 그리고 중국인들이 조선 말기에 장악했던 소공동 지역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역사의 끈질김을 느끼고 있다.

지난 주말에 하야시 히로시게 (1940년 충남 부여 출생), 2004/2007, [미나키이 백화점 三中井百貨店: 조선을 석권한 오우미 상인의 흥망성쇠와 식민지 조선] (논형),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1940,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일본의 멸망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이다. 그는 39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당시의 느낌을 몸에 전류가 흐르듯, ‘그래, 내가 오랫동안 와 보고 싶었던 곳이 이곳이었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xi)고 표현하고 있다. 어릴 때 계산하자만 5살 미만시절의 경험이 그의 생애 경험의 원형질이 되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얼음이 언 강에서 스케이트를 즐겼다. 그 당시의 추억과 모습들이 마음속 깊이 숨 쉬고 있다” (5). ”같이 하천에서 물놀이를 했던 인근의 조선인 아이들은 당시 나와 함께 용기나 모험심을 경쟁하며 싸움이나 나무타기, 시장에서 참외 훔치기 등을 똑 같이 경험한 친구들이다” (253). 따라서 자신을 해방후 한국에서 일제 침략을 전제로 자신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 자신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다면, 당시에 거주했던 최대 75만 명의 일본인 전체 (조선에 거주했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침략자가 되고, 자신의 가족도 침cirwk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자신도 침략자의 2세가 되는 셈이다. “물론 우리 가족의 조선 생활도 침략이고 수탈이었다는 것이 된다. 아버지가 금강에 제방을 쌓기 위해 설계기사로 조선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나는 침략자의 2세로 분류된다” (253). 너무 억울하다. 그토록 조선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던 그에게 침략자라니! 내가 보기에도 그가 더구나 5세 미만의 아이가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조선인들을 억압하고, 수탈하였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의 아버지도, 금강에 제방을 쌓기 위해 온 설계사인데, 그리고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조선인을 억압하거나 수탈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그는 조선인들이 스스로 일본인화하였다고 주장한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지만, 유추해 표현하자면 쇼와 15년간 (1926-40년 정도)은 특히 급속히 조선이 일본 적응화, 조선인이 일본인 적응화됐다고 말할 수 있다” (133). 그 증거로 책의 제목에 나타난 일본인이 세운 백화점에 조선인들이 많이 이용하고, 더 나아가 자부심을 갖고 이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1935년 무렵, “백화점의 경영, 마케팅 형태는 일본식이었고, 판매하는 상품은 조선의 특산품 (고려인삼)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상품들이 일본제품이었고, 고객층의 60-70% 이상은 조선인이었다. 1935년대의 경성인구는 60-1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일본인은 13-15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고객 대상을 일본인으로 한정해 생각했다면 일본인이 경영하는 4개의 백화점 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조선인은 일본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일본 상품을 좋아했다. 특히 미쓰코시 브랜드의 명성은 조선인 사이에서도 일본인만큼이나 선호했다” (13-14). 저자는 더 나아가 지나친 일본화에 대해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덧붙인다. 두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우선 구로다 가쓰히로 黑田勝弘의 [한국인의 역사관] (문예춘추)을 인용한다. “한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인이 조선에 일시 귀국하여, 1944년 경성의 한국인 거리였던 종로의 영화관에 들어갔더니, 뉴스영화시간에 상영되는 일본군 전황에 관한 뉴스를 접하면서 관객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도쿄의 영화관조차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162). 그리고 본인이 수집한 증언도 이에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조선의 많은 청소년들이 점차 일본인으로 되어 갔다는 증언이며, 내가 수집한 증언과 완전히 일치한다. 일본인이 많았던 혼마치 거리 주변이나 조선인이 많았던 종로 주변의 영화관 안에서 같은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163). 불편한 사실이지만, 그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피지배자는 강자의 논리를 더욱 강하게 주장하여야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기에 대부분의 이데올로그들은 당시의 이데올리기의 희생자를 곁에 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모두 근거가 있고, 사실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 개인적인 경험의 수준에서 침략을 억압과 수탈이라고 규정한다고 해서, 국가나 경제시스템에 의한 침략을 무시할 수 있을까? 개인과 국가나 경제 시스템의 관계가 그토록 개인들의 의도나 선호도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면 1차원적 사고일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물론 체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만과 비교하여, 조선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은 1895년에 청일전쟁 승리의 댓가로 대만을 병합한다. “대만에서는 조선과 달리 식민지 전체기간을 통해 현지의 대만상인 세력이 굉장히 강했고, 일본인 상인이 성공한 사례를 드물었다. 일본인 거주자가 이용했던 소매업은 압도적으로 대만인이 경영하던 점포가 많았다. 일본인이 찾는 일본 상품은 대만인 상인이 독자적으로 일본에서 서플라이체인(공급자 조직)을 구성하여 공급판매했다” (42). 즉 조선과는 달리, 대만의 상인들은 이미 자체적으로 일본의 거래상품들을 대만에 공급 판매하는 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대만만하여도, 이미 16세기 이래 화란이나 포르투갈 등과 일찍이 교역을 하였고, 중국대륙에서도 무역을 위해 이곳에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일본은 대만 침략 당시에 일본은 중계무역에 종사하였고, 아직 자신만의 공산품이 발달하기 이전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병합하고, 본격적으로 상품 무역으로 진출하는 1920년대에는 일본의 산업제조업은 생활필수품을 충분히 제조하여 한국으로 수출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상업 조직망 이전에 제조업의 발달의 수준이 달랐던 시기였다. 상업 조직의 경우에도 조선의 경우에도 객주, 보부상, 시전 상인등으로 이어지는 상당한 수준의 상조직이 전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초기에 상조직들이 강력하게 반일 운동을 벌인 경력이 있었다.

저자의 두 번째 설명은 일본이 만주에 진출함으로써 조선이 일본본토, 조선반도, 만주를 잇는 중간 거점으로 기능하기 위해 군수물자나 관용물자, 그리고 만주로의 무역의 중간지점으로 기능하였음을 주장한다. 이 주장은 상당한 정도 타당하다. 일본이 한국을 원료와 식량공급기지에서 공업제조기지로 전환하는 시점이 바로 1932년경, 만주국의 설립과 동시에 이루어지기에 그렇다. “혼마치 상점가는 1910년 전후부터 일본인 상점가로 꾸준히 성장했으며, 상점 반수가까이가 1926년 이전에 개업했다. 그리고 1932년 만주국 건국을 기점으로 개업이 가속화됐다. 이 시기에 전체의 40% 정고가 신규 개업해 한층 짜임새 있는 상점가가 형성되었다” (156). “그러나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건국과 일본, 만주, 중국의 블록화 형성정책을 계기로 만주를 염두에 두고 병참기지화 되면서, 조선에는 1932년부터 일본의 많은 대기업이 진출했다” (174-75).

필자는 나이 64세에 책이 발간된 것으로 보아, 60세 전후의 인생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저자는 컨설턴트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지식인에 속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한국인과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한국 기업인들의 태도를 평가하면서 의리가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이용가치가 있는 대상은 중요하게 생각해 교제하다가도, 그것이 지나면 살짝 손을 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기업이 일본기업과 제휴하고 그것을 끝낼 때의 전형적인 패턴 중 하나다” (172).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경제적인 또는 인간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표현은 없어서 문맥만으로 보면, 한국 기업인은 자신의 이익만 좇는 냉혈한으로 이해된다. 한국사에 대한 이해의 불편한 점은 일본이 한국에서 식량을 수탈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 현재 한국에서 상식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일본인은 조선인을 기아로 몰았고 쌀을 수탈했다고 하는 결론은 이 데이터를 근거해 봤을 때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조선인이 기아상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조선의 식량을 일본으로 계속 송촐했다고 하는 주장도 생각하기 어렵다” (176). 조선의 일본 기업이 조선의 식량을 일본으로 수출했고, 대신 만주의 곡물을 조선에서 수입했다는 통계치에 의거하여 전문가들은 주장하는 데,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대지 않고, 인구와 식량 통계를 근거로 한국의 식량이 부족한데, 어떻게 일본으로 수출하였겠느냐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조금 안타까운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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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의 투표에 대한 이해

시사 2012. 4. 13. 16:33

선거가 끝났다.  선거 당일 아직 개표가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동료가 전화가 받았더니, 너는 자고 있느냐며 투정이다.  선거 다음날인 어제도 한분이 선거 얘기하다, 내가 생각나서 전화하고 찾아 왔단다.  오늘도 동료 한분이 점심 같이 먹고 내 방에서 차를 마시니, 주로 선거 이야기다.  선거를 지켜보면서, 내가 아는 분들의 성적에 관심을 갖고, 그리고는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이유로 누구에게 어느 정당에 투표하였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투표도 무작위적이거나, 본능적인 투표가 아니라, 매우 이성적인 투표이고, 전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집합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투표행위는 4년마다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집합적 선택이기도 하다.


우리의 투표는 후보자 선호에 대한 의견표명, 토론, 평가 등이 주로 불법선거운동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 하는 상황이라, 될 수 있으면, 특히 잘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하지 않는다.  대개 투표는 후보자와 정당에 대한 무지의 상황에서 투표를 하게 된다.  이를 활용하듯 대부분의 후보자 역시, 거리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악수하고, 춤을 추는 의례와 예절, 유희에는 힘을 쏟지만, 정책을 알리고 다른 후보와의 차별성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는 달가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는 좋은 정책을 만들고, 국회활동을 많이 하신 분들은 유권자들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기 어렵다.  후보자의 품성이 너그러운 사회관계만이 유권자들에게 평가받을 뿐이다.


경남의 상황을 기반에 두고 보면, 지역을 분류해 보면, 3가지 정도로 나뉠수 있다.  (1) 노인층이 주를 이루면서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하는 서부권 전통지역, (2) 노동자 밀집지역으로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강한 창원과 거제 지역, (3) 부산출퇴근 권이 되면서, 부산의 영향권으로 편입되는 김해와 양산이 그것이다.  이 3지역은 유권자의 인구학적 구성, 이에 따른 정책적 이해관계, 의사소통 방식, 정당과 후보자에 대한 평가방식의 차이가 분명이 존재한다.  노인층과 젊은 층은 명백히 이해관계가 상충된다.  노인층의 복지를 가족 내에서 해결하던 시대에는 젊은 층이 잘살아야 노인들도 부양을 받아 잘 살    었다.  그러나 가족의 노인부양기능이 약화되고, 국가 의존이 심화되면서, 노인층의 정책 이해가 높아졌고, 동시에 투표 참여가 강화될 수가 있게 되었다.  반면에 젊은 층은 미래세대에 대한 투자인 육아와 교육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으면서도, 국가 의존보다는 시장의존적인 해결방식을 선호하여, 투표에 대한 응집력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최근에 시장의 불안정성이 강해지고, 개인의 노력이 한계를 보이자,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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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사 편찬의 역사철학

역사 2012. 4. 13. 15:39

오늘 오전 11시 도청 회의실에서 도사 편찬위원회가 열렸다.  책임편찬자이신 이만열 선생님이 1987년 체제의 산물인 1988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도사](상중하 3권분량)와는 다른 2013년 체제에 걸 맞는 도사 편찬을 주문하신다.  이번에 발간될 도사는 2014년에 발간될 예정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영제 교수님은 도지편찬과 도사 편찬을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시면, 무엇인가 역사를 꿰 뚫는 시대정신이나 역사 철학을 강조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단순한 사실 나열에 그치면, 도지에 지나지 않으므로, 통계나 문화재 등은 부록으로 엮자는 것이다.


물론 역사철학이나 시대정신의 내용을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우리가 갈구하는 것, 현재를 통해 과거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원칙이나 기준 등이 되지 않을까 싶다.  왕조시대의 역사 서술은 주로 지배자들에게 과거의 사례를 들어 통치술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 서술을 누가 읽고 어떤 교훈을 얻게 서술되어야 하나? 지배층, 아니면 피지배층인 민중인가?  민주공화의 관점, 자유시장경제의 발전의 관점, 사회적 통합의 관점, 문화의 수용과 변형의 관점 등, 여러 가지의 관점이 있을 수 있고,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주제들이다.


역사는 결국 나의 선조들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주관적인 관점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즉 우리 조상, 이웃, 우리 민족 등의 이야기이므로, 잘못 서술하면, 조상과 이웃과 민족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심지어는 그 공동체로부터 따돌림이라는 정신적인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칫, 역사서술은 하나의 사실을 대해서도 지역마다 다를 게 서술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교훈의 측면에서 본다면, 현재의 경남이 필요한 덕목들(시대정신들)을 나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개방과 통합, 혁신과 모험, 창조와 관용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남의 역사에 이런 덕목들이 구현된 사실들이 나타나면 이를 채택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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