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바이마르 공화시기 지식인들의 전체주의적 성향

역사/1930- 2013. 3. 2. 15:47

 1.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762항목, “유럽의 민주주의가 힘의 해방이라고는 조금도 말할 수 없다. 특히 그것은 나태함의 , 피로의, 약함의 해방이다” (Nietzsche, 1880년대/1988: 445).

 모든 민족의 머리 위에는, 모든 선의 표적이 걸려 있다. 보라! 이것이야말로 그 민족이 극복한 것들의 표적이다. 보라! 이것이야말로 그의 권력에의 의지가 지르는 소리이다” ( Nietzsche, 1885/2010: 79).

 니체의 비이성주의는 결국 범 게르만주의와 히틀러 스타일의 인종주의로 귀결되었다. 비이성주의는 이시기의 독일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과거에 독일의 철학과 사상이 제공하였던 인간의 약한 측면에 피난처를 제공하였던 그 근거를 없앴다....이러한 비이성적 본능의 강조 등은 결국 히틀러의 제삼 제국 시기에 독일 신념 운동에서 다시 등장한다....“더구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이데올로기는 미래의 나치들에게 일단 니체의 뜻이 오해되고, 곡해되고, 그리고 진실된 의미가 뒤틀려지자, 나치의 독트린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Vermeil, 1956: 18).

 2. 1924-1929년의 기회와 좌절

 1924-29년의 황금기 (6년간):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 시기는 독일이 정상적이었다고 판단하지만, 실은 이시기에 이미 후기 독일의 모습이 잉태되고 있었다” (Taylor, 1946).

 1926힌덴 부르구의 당선은 독일 국민이 의원내각제적 정부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전쟁전의 권위주의적 정부가 제공하던 안락한 안전으로 도피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니콜스, 1977/1980: 140).

 슈트레제만은 가장 중요한 국경협상을 東歐의 프랑스 맹방들 (특히 폴란드와 체코)를 제외시킨 채 마음에 드는 서방국가들에 국한시켜 진행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4대 강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 협의하여 유럽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개념이 1938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악명높은 뮌헨의 배신에서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의 사건들을 예고해 주는 전조였다” (니콜스, 1977/1980: 133). 1926년에 슈트레제만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정당을 통해 구체적인 이익이 표현되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며, 불명예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려면 이러한 부분적 목표가 정치적 리더쉽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공화국 정부가 의회의 지지를 얻으려면 사전에 연립정당간의 타협과 협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부가 의회를 무시해버리지 않는 한 일관성 있는 정책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니콜스, 1977/1980: 148).

 1928년 가을, “독일 국가민족당의 정책은 이제 공화국에 대한 거칠고 무제한적인 반대로 굳혀졌다” (니콜스, 1977/1980: 150).

 3. 독일 지식인의 전체주의적 경향

 프랑스에서 새로운 정치적 및 문화적 가치를 대변하면서 등장한 사람들이 주로 보수적 이념과의 단절을 통해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독일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일군의 문명비평가 내지 사회비판가들은 교육시민 계층출신으로 빌헬름 제국의 주도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박용희, 2002,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식인과 정치문화”: 111).

 대학의 경우 역시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바이마르 체제를 경멸했다. 2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보다 권위주의적인 정부형태로 국가를 개혁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니콜스, 1977/1980: 147).

 4. 19331월 히틀러의 등장

 히틀러에게는 이상한 점은 없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것이 오랫동안 지체된 셈이었다. 이 지체는 독일인들 원망의 비극적 비상치성(하나로 일관성있게 묶을 수 있는 끈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 부유하고 (떠돌아 다니고) 무책임한 젊고, 폭력적인 자들이 허가받은 깡패로서의 기회를 쟁취하였다” (Taylor, 1946: 25).

 독일인들은 절망의 마지막 순간에 민족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결국 혼란에 협박을 받아서 그들의 높은 철학적 사유의 능력과 전통을 놓치게 된다. 독일의 가장 훌륭한 전통으로 추앙받던 것이 이제 전체주의적 지배의 도구로 변하게 되었다( Anderson, 1949).

 참고문헌

박용희, 2002,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식인과 정치문화”, 오인석 편, [바이마르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Eugene N. Anderson, 1949, The Struggle for Democracy in Germany,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A. J. 니콜스, 1977/1980, [바이마르 공화국과 히틀러], 과학과 인간사

Friedrich Nietzsche, 1880년대, [Der Wille zur Macht 권력에의 의지], 청하, 1988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85/201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ura], 누멘

A.J.P. Taylor, 1946, The Course of German History: A Survey of the Development of Germany since 1815, New York, Coward-McCann

Edmond Vermeil, 1956, Germany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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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군단과 재향군인회

역사/1930- 2013. 2. 26. 14:35

 

밤에는 야경꾼이 돌고, 마을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위대가 구성되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외세가 침입하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섰다. 따라서 국가가 조직한 군대 외에도 역사적으로 민간이 조직한 군사조직은 항상 존재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독일의 경우에 프러시아에 17세기부터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국가외 조직이 존재했었다, 특히 국가가 프랑스와의 7년전쟁, 나폴레옹에 의한 해방전쟁 시기에 애국적으로 마을을 지키려는 의용자위대가 조직되었고, 이는 국가에서 칭찬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참전장교와 사병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자유군단이 조직되었다. 자유란 아마도,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자율적인 군대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이미 1차 세계대전시기에는 국민 개병제가 실시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베르사이유 협약에 의거하여 국민 징병제는 다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1차 대전 후에도 수십만명 (혹자는 백만명 단위를 거론하기도 하나 40-50만 명 수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이 속해있었고, 이들의 규모는 정규군이 10만 명으로 제한된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숫자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국가의 위기시에 심지어, 히틀러의 등장과 같은 시기에도, 오히려 정부의 정규군이 히틀러의 돌격대와 자위대에 눌러 있을 정도였다고 보면된다. 히틀러의 돌격대와 보위대는 자유군단 출신들이 그 구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이들 자유군단은 무슨 일을 하였고, 어떻게 재정을 충당하였는가? 자유 군단은 겉으로만 보면, 국가적인 수준의 일을 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하고, 프랑스가 배상금의 불이행을 근거로 라인지역을 점령하자, 파업을 선동하고, 폴란드 지역에서 전위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신문 광고를 통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용병으로 고용할 수있다고 광고도 하였다. 사회적으로 국가의 경찰이나 군인이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러나 사회적으로 해결하여야 하는 일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료로 봉사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마치 직업군인처럼, 급여를 받고, 추가적인 보너스도 충분히 받고, 연금혜택까지 받았다. 이들의 수요는 국가적인 수요를 빙자하여 사업적인 수요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군단과 이들이 히틀러의 등장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자동적인 연관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또 다른 연구 대상이다. 이에 대해 J.J. Schokking, 1955, “Militarism in Berman Society”는 국민 징병제의 등장이 상비군 제체와는 다른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상비군의 폐쇄성을 혁파하여, 상비군이 개인적인 충성심으로 뭉쳐있는 상황을 완화시킨 반면에, 국민 개병제는 국민들의 심리나 행동방식 속에 군사주의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 면을 강조하다. 이렇게 확산된 결과 그들의 확신은 단순한 충성심을 넘어서서,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을 포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John L. Snell ed., 1959: 60). 구체적으로 가장 민감한 청춘의 시기에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은 특유의 사나이의 특성을 갖게되었다. 또한 군대에서 맺은 사회적 관계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되었고, 이는 민주적인 질서로 재편하는데 장애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사호의군대화가 진행되어서, 전쟁에서의 패배나 내부로부터의 혁명과 같은 방식이 아니면 이것이 타파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경우에,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바이마르 제국을 끝장낸 노동자사회주의 혁명에 의해서만 바이마르 민주주의 체제가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독일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이마르 체제도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Schokking은 바이마르 체제에서의 자유군단과 히틀러가 자유군단과 독일인들의 군사주의적 성향을 이용한 것은 다른 측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는 너무 히틀러가 시대에 대해 완벽하게 독일사회를 이용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독일의 군대사회적 성격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도 군사조직에서 베르사이유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사실상의 군사훈련을 민간 항공사, 민간 항공기 제조의 제조를 진행하였고, 또 러시아와의 협정을 통해 군사훈련도 진행했다. 그리고 민간 군사조직이 정규군에 비해 적어도 4-5배 이상이 존재하였기에 쉽사리 군대로 재편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더해, 군사전략이나 새로운 군사기술을 활용하는 것에 능숙하게 대해 전격전을 활용한 점도 히틀러의 대담한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전문가들은 공수부대의 활용, 전차군단과 통신장비를 활용한 적군의 종심을 관통하는 전격전, 전략에서 후방과 전략적 거점을 상공을 통해 장악하여 심리적으로 상대방의 저항의지를 초기에 꺾어 버린 점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도 히틀러의 전쟁을 자신들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헌신적으로 지지하였는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진다. 상당수의 해석에서는 외부의 과격함 (볼세비키)을 싫어하였기에, 내부의 과격함(히틀러)을 선택하였을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에 이미 미국에서는 전쟁에 게임 논리를 도입하여 전략게임을 랜드연구소를 통하여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병력자원, 무기자원, 국민들의 사기, 전반적인 경제능력 등은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팽창해져 있었고, 히틀러 자신도 전쟁 후기로 접어들면서 대담한 작전을 두려워 한다. 즉 수세로 몰리면서 대담성이 줄어들고, 그래서 초기에 나타난 독일군의 전격전은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Christopher Ailsby, 2001/2007, [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 2차세계대전 최강 독일 공수부대의 신화], 프래닛 미디어

Gorden A. Craig, 1955, The Politics of the Prussian Army, 1640-1945, Oxford, The Clarendon Press

Allan Shepperd, 1990/2006, [프랑스 1940: 2차 세계대전 최초의 대규모 전격전], 플래닛 미디어

Robert G. L. Waite, 1952, Vanguard of Nazism: The Free Corps Movement in Postwar Germany, Cambridge, Mass.: The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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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 우월주의와 열등인종 학살

역사/1930- 2013. 2. 25. 12:14

 서구의 인종주의는 공식적으로는 폐기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종 차별적 언어나 관행은 지속되고 있다. 이의 근원은 바로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간다. 즉 서구가 산업혁명을 이루고,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직접 지배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선구자적 인종 결정론은 당시에 고비, An Essay on the Inequality of the Human Races (18531855)를 통해 이루어 진다 (고비노의 이론은 Nicholas S. Timasheff, 1955/1961, Sociological Theory: Its Nature and Growth, 사회학이론, 수도문화사: 74-76를 참조).

 이 이론은 가장 자명한 명제로 (1) 문명의 흥망이나, 국가의 흥망은 우세한 인종의 혈통 순수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당시에 널리 인용되던, 서구의 진보론을 거부하고, 서구는 현재 팽창하면서 인종이 혼혈이 되어서 퇴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고비노는 독일인들이 생물학적으로 좀 더 혼합종이기 때문에 불란서인들보다 민족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였다. 진실로 우월한 민족은 영국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그는 논하였다” (Timasheff, 1955/1961: 74). 그에 의하면, 북구 유럽 사람들과 북부 독일, 그리고 영국인들이 가장 순종인 백인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후에는 미국, 독일 발달하자, 이론을 수정한다. 백인이 다른 인종과 합쳐도 백인종의 우월성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 두 번째 명제로는 아리안 우월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모든 주요한 문명들은 백인종의 최고의 줄기를 이룬 아리안인종이 달성한 것이었다” (Timasheff, 1955/1961: 75). 이는 물론 사후적인 설명이다. 즉 과거에는 백인종보다도 우월한 문명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명은 백인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하므로, 아리안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한 문명이고, 따라서 백인종이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우월주의는 두가지 형태로 구체화된다. 즉 저열한 인종은 우월한 인종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과, 동시에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이 부족하므로, 저열한 인종의 영토를 침략하여 이들을 몰아 내는 것은 문명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나치의 인종이론가인 Hans F. K. Günther는 아리안 인종중에서도 노르딕 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고, 이는 독일 게르만 민족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독일 게르만 종족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 1922, Rassenkunde des deutschen Volkes, 독일민족의 인종과학). 즉 아리안 인종이 코카사스 산맥 아래에서 시작하였다면, 게르만 종족은 민족 대이동시기에 고트, 반달족 등의 이름으로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한 종족이다. 아리안 종족에는 아시안 아리안 즉, 셈족까지 포괄하는 것이었으나, 나치의 지도자들은 아시안 계통의 아리안 족은 배제한다. 그러나 나치의 갈고리 상징모양 (불교의 상징을 방향을 바꾼 모양)이나, 스스롤 정당화할 때는 힌두교의 베다, 시들을 인용하였다.

 (3) 당시에 인종이론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은 현실에서의 이종족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윤리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것이기에 환영을 받았다. 19세기 중반의 고비노 이론은 프랑스에서 그의 이론은 많은 사람의 상상을 황홀케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퍼져 있던 진보이론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Timasheff, 1955/1961,: 75-76).

 독일은 고비노의 이론을 이어받아 Houston Stuart Chamberlain (1855-1927)19세기 말에 독일에 소개한 소개하고, 독일어로 [19세기의 기초]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결국 프러시아의 빌헤름 2세와 그의 주변에 영향을 주었고, 후에 나치는 이를 취하여 인종이론에 기초한 침략, 우생학적 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다. 특히 챔버린이 1899년에 발간한 책은 그 후 10년간에 걸쳐 약 6만부가 판매되었고,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10만부가 판매되었고, 1938년까지 25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즉 지속적인 베스트 셀러 자리를 유지한 셈이다. 미국에서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향을 주어 1924년의 이민제한법을 정하는데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4) 아리안 우월주의는 반대로 흑인과 유태인은 열등민족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애초의 고비노나 챔버린의 반유대주의에서는 주장되지 않았지만, 나치 시기의 이론가인 군터에 의해 제기되고 이론화되었다. 즉 고비노는 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에서 오히려, 유대인들은 어려운 자연조건에서도 이를 극복한 자유롭고, 강하고, 지적인 민족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자치에 의해 편집되었다. 챔버린의 경우에도 유태인에 대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중세이후 반유태주의 정서는 독일에 이미 만연해 있었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와 경제적 경쟁관계에 의해 더욱 촉발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대항하여 발생하였다는 점, 그리고 유대인들이 상인이나 금융업 등에 중사하였으므로, 이 분야의 경쟁관계에 있는 토착인들의 배척을 받았을 것이다. 나치의 이론가인 군터도 유대인들의 특성을 상인정신을 가진, 그리고 기교가 많은 무역가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85년에 Josiah Strong 목사가 인종주의 사상을 배태하였다. 반유대주의적 사회적 분위기는 프랑스의 드레퓨스 사건, 그리고 러시아의 유태인 대학살에서 드러난다. 러시아에서는 19세기 중엽이후 1905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유태인에 대한 민중의 학살과 박해가 일삼아 졌다. 당시에 수천 명이 죽은 것으로 보고된다.

 (5) 히틀러는 1938년부터 시작된 체코 침입, 그리고 1939년의 폴란드 침입에서 같은 아리안 계통의 인종끼리 침입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혼란을 느끼게 된다. 폴란드, 체코 민족은 아리안 계통이기는 하지만, 폴란드는 1939년 침략 당시에 하위 인종으로 다시 규정하여,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체코는 물론 독일 거주인들 Sudeten문제로 침략하기는 했지만, 역시 인종적으로 몽골계통이 섞인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하여 아리안 인종에서 철회하고, 침략 대상이 된 것으로 주장한다.

 물론 러시아를 침입할 때는 슬라브 민족은 인간에 속하지 않고, 하위 인류에 속하므로,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전쟁포로에 대해서도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 Lebensraum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슬라브 민족이 살던 지역으로 참략하여, 이들을 몰아내고, 우월한 인종인 게르만 민족이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물론 전쟁 말기 병사의 숫자가 부족해 지자, 슬라브 인종도 전쟁주인이 아니라, 도구로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을 일부 변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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