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과 독박의 민주주의는 결국 나치의 독재로 나아간다.

역사/1930- 2013. 2. 18. 17:29

대중 민주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나치의 등장처럼 역사에서 극적으로 그 위험성을 드러 낸 적은 없다. 대중 민주주의는 결국 전체주의에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Gerhard Ritter (1955, “The Fault of Mass Democracy”)1920-30년대 독일의 상황을 살피면서, “왜 합헌적 자유 의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절호의 기회에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를 낳게 하였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나치 등장의 초점은 민주주의 원칙을 통해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고, 장악한 이후에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 체제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민주중의를 통해 전체주의를 선호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일단 나치가 전체주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연대기로 서술해 본다. 물론 전체주의는 관료제 만이 아니라, , 대중조직, 독재자 개인 추종 조직 등을 동원하는 형태를 띤다.

Ritter가 지적하는 1920-30년대에 중부 유럽에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로 전환된 역사적 배경에서 다음 2가지는 현재 우리 상황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1) 시민이 아닌 대중의 등장

정치교유, 진정한 토론, 개인들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소구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제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게 되었다. 감각적인 사람이 대중적이 되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적대감을 불러오는 것이었고, 가장 덜 효과적인 것은 평화적 사유이었다. 평화적인 사유는 독자나 청자가 생각하고, 어느 정도의 학습욕구나 지식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덜 효과적인 방식이 된 것이다.

(2)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

정치적 선전을 위한 새로운 기술 능력은 부루주아지 시대보다 대중의 동원을 용이하게 하였다. 확성기, 라디오, 수천 부를 단숨에 발간하는 일간지들, 군사들을 신속하게 수송하는 화물열차, 철로와 도로와 항공로를 통해 대량수송이 가능해 진 점. 이에 따라 국가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신속하게 정보를 전파하고, 매일 밤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해 연설이 가능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국가 정당 대회에 50만 명을 모아놓고 연설하였다.

 

결과적으로 토론을 통한 의회민주주는 무시되었고, 급진적 민주주의가 가능해 졌다.

현실적으로는 직접 민주주의 이론에 기반한 국민 주권의 이론이 현실적으로 가능해 졌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가능해 진 것이다. 이제 대중은 직접 정치의 주역이 될 수 있고, 의회를 통한 우회적인 방식이 유일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이는 의회민주주의 체제와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영국의 대의 민주주의는 대다수의 정치적 권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주의의 여러 계층에 의해 향유된 정치적인 특혜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는 근대 의회에서 집단화되어 근대적인 정당이 되었다. 중요한 사람들의 집단이 인민을 대표하였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집단들이 서서히 19세기에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1920-30년대의 독일에서는 민주적 급진주의에 핵심인 인민의 의지에 따른 직접 통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급진적 민주주의는 단호한 결정이 중요하고, 타협이 중요치 않았다. 주권은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수의 권력을 무시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지성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급진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적 압제로 변하는 조건 (Ritter의 견해).

(1) 사회적으로 비조직화된, 지적으로 단일한 대중들이 정치화될 때

(2) 과거의 정통성에 의존한 공공 권위가 파괴되고, 신뢰를 잃었을 때.

(3)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지배에 대한 불신이 불붙고,

(4) 추종자들이 뭉쳐서 치밀한 전선을 형성하였을 때

> 이럴 때 대중들은 애매한 제도를 믿기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을 믿게 된다.

 

교훈: “일반 국민들은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더욱 예민해야 하고, 또 여러 문제들, 예컨대 생명에 대한 존중, 다양성과 모순적인 경향들의 조화를 통해 풍부함을 누리는 것, 낯선 것에 대해 개방적이며 그 가치를 인정하고 배우는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용 등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보다 건강한 사회 건설의 기반이 될 것이다” (김승렬, 2004, “대중에 대한 독재 또는 대중에 의한 독재? - 나치 독재의 대중적 기반”: 264).

 

참고문헌: 리터의 글은 Maurice Baumont, John H. E. Fried, Edmond Vermeil, and others, 1955, The Third Reich, New York, Frederic A Praeger, Inc.에 수록

김승열의 글은 임지현, 김용우 엮음, 2004, [대중독재] 책세상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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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연설의 특징

역사/1930- 2013. 2. 9. 15:37

(1) 작은 거짓보다는 큰 거짓을 말하라.

거짓을 말한다면, 큰 거짓을 말하라. 큰 거짓은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것보다, 더 깊은 심연에 있는 감정적 성격에서 소화될 것이기에, 더 큰 확신의 힘을 갖고 있다. 커다랗고 자명한 거짓은 기억에 남으면서도, 거짓일까 의심하기가 어렵고, 그런 것을 거짓으로 날조했을까 의심하기도 어려워 진다.

(2) 잘못을 인정하지 말아라.

  주저하지 말라, 말한 것을 덧붙이지 마라, 절대로 다른 편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마라, 모든 것을 흑백으로 구분하여 대조시켜라”. 이것이 바로 모든 종류의 선거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이다: 체계적으로 다루는 문제를 한편으로 치우치게 하라. 적에 대해 굽힘없이 공격할 때는,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자에게 정의가 간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게 된다. 공격을 중간에서 멈출 때는 성공을 하기 어렵다. 이는 대중들이 자신의 말이 정의로운 것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다“ (Bullock, 1952: 3).

  (3) 모호하게 반복하라.

  다양한 표현이 서로 중첩해서 나타나 더욱 모호해진 내용은 대중을 현혹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히틀러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기보다 특정 부분을 반복적으로 표현해 청중의 머리에 주입시키려 했다” (김종영, 2010: x).

  1932년말 뮌헨의 오스트리아 총영사가 히틀러에 대해 오스트리아 총리에게 보고한 내용: 그는 선전할 때 우선 부정적이고 비판적 측면이 강조되도록 조절하고, 긍정적 측면은 윤곽만 제시해서, 그 계획이나 약속의 실행 가능성을 전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불만 있는 다수를 끌어 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김종영, 2010: 55).

  단순반복의 효과, “”예컨대 청중이 동일한 내용을 한 세 번쯤 듣게 되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네 번째 들을 때는 벌써 생각하기 시작한다. 연사가 말하는 것이 청중자신이 이미 오랫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하고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말이다“ (김종영, 2010: 30).

 

  히틀러에 당하지 않으려면

  (1) 수사와 논리의 훈련을 받아라.

  언어와 사고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히틀러의 연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몸서리치거나 웃으면서 피할 것이다 (Olden, 1981, Hitler: 84).

  (2) 자극적인 것만 찾지 말고 스스로 미래의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

  왜 대중은 히틀러를 지도자로 여겼는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은 자극적인 에너지에 눈이 멀었고, 나이든 지식인들은 더 이상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를 갖지 못하고, 결국은 과거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더욱 보수화했다” (Heiden, 1936, Adolf Hitler: 94).

  (3)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나 히틀러의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범죄국가가 정의와 불의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면, 어느 누구나 피해를 입게 된다. 인간의 본성 자체는 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 늑대가 되는 데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치 않다.....우리 속에 아이히만과 같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이히만과 같은 본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더 늦기 전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더욱 필요하다.... 인간 사회에 기반을 둔 명확한 규범으로 통치하는 그런 국가만이 역사의 정의가 불의로 바뀌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크놉, 1998/2011: 28).

 

참고 문헌

Bullock, Alan, 1952, Hitler: A Study in Tyranny, New York의 축약된 것이 John L. Snelled., 1959, The Nazi Revolution: Germany’s Guilt or Germany’s Fate?, Boston, D.C. Heath and Company: 1-8에 수록된 것을 참조

Knopp, Guido, 1998/2011,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서울, 울력

김종영, 2010, [히틀러의 수사학] 서울, 커뮤니케이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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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희생 하에 나타난 독재와 산업화: 1930년대 경성방직의 사례

역사/1930- 2013. 2. 7. 17:11

  1930년대는 세계적으로 불황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경성방직은 오히려 생산을 늘리고, 매출이 증가하였다. 이 이유에 대해 경방에서 출판된 역사책 (주식회사 경방, 1980, [경방 60: 1919-1979])에서는 애국적 소비를 우선 들고 있다. “경방은 또 영업정책에 있어서도 민족주의를 유리하게 도입했다. 특히, 시장개척에 있어서 조선인은 조선인의 광목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민족기업의 육성을 호소했던 것이다” (조기준, 1973, [한국기업가사], 박영사: 262). 특히 (1) 관서, 관북지방과 만주지역에서의 애국적 소비를 들고 있다. 관서와 관북은 근대 문물의 영향을 일찍 받았고, 민족 저항운동이 강하면서, 또한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조선방직 (일본인 기업, 공장은 부산 소재)의 제품이 남부지방을 점거함에 비추어, 경방제품은 경기이북 특히 선천 등지를 중심한 평안도로 진출했다. 이것은 관북지방에 일찍부터 뿌리박고 있는 민족주의에 호소하여 시장개척을 기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경방이 북관지방의 시장개척에 관심을 둔 것은 뒤에 경방이 만주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방의 제품이 견고하고 둔중하였다는 점은 만주시장의 개척을 용이하게 하였다” (조기준, 1973: 264-65). 이런 지역에서 애국적 소비가 발생하였다. 또한 (2) 당시의 조선 물산진흥운동, (3) 일제 수입품이나, 일본기업인 조선방직의 제품보다는 민족자본인 경성방직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 풍토가 작용하였다. (4) 또한 경성방직의 입장에서는 만주의 중국인들이 19312월에 발생한 칠보산 사건시에 경방이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하고, 만주의 중국인들이 항일의 감정으로 인해 경방의 제품을 많이 구입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경방, 1980: 90).

두 번째로, 애국적 소비 외에도, 불황기에 저가품을 선호하는 경향도 한 몫을 차지하였다. 즉 품질은 떨어지지만, 내구성과 가격 면에서 저렴한 제품을 선호하는 만주지역, 북한 지역의 주민들의 소비 성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에 농민들은 곡가 하락, 곡물검사의 국가이관 (1932. 10), 면화의 지정공판 (1933. 3), 농민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었고, 공업 분야도 제조업의 불황에 따라 임금이 삭감되는 상황에 처했다.

세 번째로, 중국내부의 생산의 붕괴로 공급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시작하자, 중국 내부의 면방업계가 생산을 못하게 되자, 이미 만주에서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던 경성방직의 제품들이 판매가 호조를 띄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의 산업들은 거의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특히 우리 경방과 같은 업종인 중국 방적공업은 그야말로 정지상태를 면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중국의 북방인 만주에서 평판이 좋았던 경방제품인 不老草標는 곧 화북지방으로 퍼지게 되었다” (경방, 1980: 100).

 경성방직은 1939년에 중국 만주 소가둔에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한국민족기업 최초로 해외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고 조기준은 서술하고 있다. “1939년에는 자본금 1천만 원 (본회사 전액 인수)이 전액 불입된 남만주방적회사를 만주 소가둔에 설치하고, 이미 개척한 만주내의 판로를 확보함으로써 한국 산업의 국외진출을 실현시켰다” (조기준, 1973: 260). 경성방직에서 스스로 서술한 역사에도 이점을 강조하듯, 소제목으로 만주사변과 경방의 발전” (경방, 1980: 88- ), “청년기로 접어든 경방과 만주 진출” (경방, 1980: 103)을 달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1936년 애초에 국내 시흥에다 공장을 세우려는 계획을, 총독부의 권유로 만주에 세우기로 결정한다. “불로초(광목 상표)에 대한 인기가 (만주에서) 날로 높아감에 따라 그에 대한 수송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만주에다 공장을 세울 것 같으면 이 문제도 아주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었다” (경방, 1980: 105). 그 허가를 내린 것은 1937918일이었고, 애초에 중국 통천을 고려하였으나, 전장지역이라, 보류하고, 당시에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지역에 중국인 자본과 같이 하려 하였으나, 일본 특무기관에서 거부하였다. ”1939년에 만주 蘇家屯에다 공장을 짓기로 하고, 그곳에 27만 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하였다. 소가둔은 만주의 교통요충지로서 봉천 조금 못미처 있는 넓은 들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방, 1980: 106). 남만 방적 주식회사가 그것이고, 1942년에 생산을 시작하고, 1943년에 남만 방적이 본 궤도에 올랐다고 전한다.

  번역을 시도하였으나, 되지 않은 Eckert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경성방직의 역사를 탐구한 뒤에 소위 식민지 유산에 대해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Carter Joel Eckert, 1986,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the Koch’ang Kims and the Kyongsong Spinning and Weaving Company, 1876-1945, Ph. D. Dissertation Thesis, University of Washington, U. S.). Eckert가 박사학위를 쓰던 시점에서도 역시 한국은 민족자본가에 의한 발전이 이룩됨과 동시에 독재정치체제가 발달했던 나라이다. 이런 점은 대개의 경우, 민족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체제를 선호하였던 서구의 역사적 경험과 상치되었기에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Eckert는 민족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식민주의적인 유산이 더 풍부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의 부루주아지는 해방직전에 정치적으로 취약했고, 비민주적인 세력이었다. 이는 부르주아지가 지주계급과 합세해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특수상황이 있었다. 서구의 경우에는 지주계급과 상공인세력이 투쟁을 하면, 상공인 계급이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취해 민주주의가 발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투쟁이 없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지주계급과 상공세력이 하나의 뿌리였기에 상호 투쟁할 상황이 아니었다” (Eckert, 1986: 538). 물론 조선 후기, 특히 개항기에 조선에도 상당한 수의 상인들이 존재했고, 이들 중 관과 유탁한 상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상인 계급이 산업자본가로 이동한 경우도 있었음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조기준, 1973). 그러나 아무튼 Eckert의 논리는 따르면, “이런 상황은 조선을 일본 산업자본의 시장과 식량기지로 이용했던 일본의 정책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토착 자본의 산업화도 일본의 자본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지, 자체 자본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경성방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Eckert, 1986: 539). “한국의 정치는 결국 지주와 상공자본가에 투쟁에 의한 내부적으로 결정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일본의 침입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Eckert, 1986: 539)고 강조하고 있다.

  국가- 산업활동과의 관계가 식민지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어 사회적으로 작동하였기에 산업가들은 독재체제에서도 오히려 편안하게 자본주의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Eckert의 논리를 따르면, “이는 결국 국가-비지니스와 관계를 결정짓기도 했지만, 정치의 형태도 결정지었다. 총독부 독재 정치체제라는 것은 일본과 조선시대의 정치형태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의 식민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에서 만들어진 정치체제이다. 이는 서구의 부르주아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한국의 부르주아는 독재체제에서 국가의 협력을 받아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게 되는 특이성을 보이게 되었다. 일제는 토착자본가들을 식민지 산업화에 동참시킴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착취만이 아니라, 한국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차단하는 데에도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Eckert, 1986: 541). 이에 이르면 경성방직의 경우에 민족자본가로서 교육사업에 참여하였거나, 민족적인 정서에 의존하여 사업이 팽창하였다는 주장에 반하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행위자의 문제로서보다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구조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토착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토대가 민족주의에서 멀어지면 질수록, 총독부의 독재 권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경험은 독재가 자본축적에 편안한 정치적 모델이 되었고, 경제적 민족적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한국 부루주아지의 생존을 위해 독재가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독재와 결합하여 자본주의적 사업이 성공한 것은 결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희생 위에 탄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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