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노동의 등장으로 취착당한 사람들

역사 2009. 3. 24. 08:27
19세기 세계적으로는 임노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이의 피해를 입은 계층의 반발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18세기부터 임노동이 본격적으로 영국에서 등장하고, 이에 따라 봉건제 농촌에서 소농이나 예속농으로 일을 하던 농민들이 도시에서 임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유럽대륙, 신대륙, 그리고 나머지 제국주의 침탈의 대상이 되거나 아직 되지 않은 나라들의 경우에는 여전히 장안노동, 노예노동, 농촌 노동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임노동이 서서히 그러나 강고하게 등장하면서 공장에서 아니면 플랜테이션의 농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임노동의 형태와 동시에 존재하던 노예 또는 자유 노동자의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시기이다.

임노동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계층은 공장제도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장인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가내 수공업의 형태로 장인과 도제제도를 통하여 제조직종의 특정분얄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공인들이 공장제도를 통하여 기계를 도입하여 이제는 어린이나, 부녀자가 하는 노동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잘 아시다시피, 기계파괴운동이 간헐적으로 그러나 이들의 반발에 의하여 즉흥적이고 본능적으로 일어났다.  19세기가 되면 일단 영국이나 유럽대륙에서도 장인노동은 사라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정도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영국은 가장 먼저 사라진 나라이고, 유럽대륙은 그래도 서서히 파괴되지 않았나 싶다.  재미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이들 장인 노동자들이 TRADE UNION을 세운다. 현재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사용하고 노동조합의 명칭이다.  trade union이라는 말은 실은 장인노동자들의 단체임이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소극적인 그리고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주로 한다는 이유로 도입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미국은 이들 장인노동자들이 독자적으로 19세기 노동운동을 격렬하게 주동한다.  이후에 서서히 숙련노동자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19세기 말에가서야 나타난다.

19세기는 실은 임노동자의 시기도 아니었고, 장인노동자의 시기도 아니었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노예노동이 판을 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않을까 싶다.  아프리카에서의 노예거래가 19세기 중엽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중지되지만, 밀무역은 여전히 판을 치고 있었고, 플랜테이션에서는 노예제도를 선호하고 있었고, 매매춘이나, 상당수의 가내노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때로는 채무노예라고 불리우는 노예들은 자본주의 시대에도 성행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신체포기각서를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노예는 아니지만, 이제 막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나, 농촌이나 다른 나라에서 일거리를 찾아 온 이들은 자유노동자로 살아갔다.  자유 노동자라는 뜻은 이념적인 뜻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일을 하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는 뜻에서 자유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로운 만큼 도시내의 각종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  물장사, 오물치우는 일, 거리에서 사람들을 나르는 일, 짐을 나르는 일, 음식물 장사 등은 거의 세계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심할 경우에는 매매춘으로 들어가거나, 그래도 편하게 다시 노예상태나 다름없는 가내일꾼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의 등장으로 고용된 신규 노동력은 어린아이들과 부인노동의 등장이다.  이들은 남성노동의 감소를 가져와 상당수의 가정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전략의 하나로 일단 아이들의 노동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인 노동의 등장은 가족의 전략에서는 가장 최후의 전략의 하나였다.  물론 일부 선진적인 영국의 도시에서는 부인노동자들이 선진 여성운동가의 도움을 받아 노동운동을 벌인 일이 있지만, 이 역시 매우 아이러니칼한 일이었다.  가장 노동운동이 덜 필요한 이들이 나선 노동운동이라는 것이다.  즉 임금노동의 필요성이 적은 여성들이 나서서 노동운동을 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인간 인식과 행동의 한계일수 밖에 없다.  즉 인간은 자신의 객과적 처지를 알수는 없고, 그들의 불만은 항상 상승하는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를 다른 집단과 비교하고, 그럴때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다.  따라서 아주 피곤하게 종일 일을 하고 남들과 말할 기회도 없고, 세계의 흐름에 대한 지식이나, 인적인 조직적인 네트워크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을 느낄 시간도 없거니나, 설사 불만을 느꼈다고 하더라고 고립되어 집합행동을 일으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영국에서 일찍이 여성노동과 어린이 노동에 대한 규제를 시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노동시간은 19세기 초에는 하루에 12시간을 넘어섰고, 일주일에 70시간 이상 일을 하는 제도였다.  이런 제도에서는 자신의 생물학적 생존외에 다른 생각이나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맺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면 독일을 선두로 해서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이 등장한다.  맑스주의 이념이 공식적으로 인터내셔널을 통해 채책되고, 엥겔스, 그리고 카우츠키와 베른쉬타인을 통해 정치세력화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현재의 독일의 사민당은 바로 1890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된다.  당시에 사민당은 전체 유권자의 20%정도의 득표를 기록했다.  물론 이후 노동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농업문제, 수정주의 문제를 전환점으로 기폭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의 정당으로 지금도 유럽과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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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은 사람이 나쁜 말인가?

교양 2009. 3. 19. 14:01
며칠전에 동료 교수님들과 같이 모인 자리에서 디오게네스가 개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는 실은 코스모폴리탄,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을 언급한 일이 있다.  그냥 재미로 한말이었는데, 곧 이어서 비슷한 시기의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에 양자라는 사람이 사람과 개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  양자는 개가 사람을 알아보지않는다고 투덜대는 사람에서, 사람이 바뀌었으니, 알아보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개도 모습이 바뀌면 사람이 알아보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디오게네스와 양자가 꼭 같은 맥락에서 얘기했다고 볼수는 없으나, 아무튼 사람들은 예전에 사람과 개를 가까이 살면서 서로간에 비교를 많이 했다는 점을 알수 있다.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을 불신하여 시니시즘을 원류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주로 말을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깨닫게 하려고 시도한 사람이다.  시니는 개라는 뜻을 갖고있다.  그럴정도로 개와 사람의 비교를 매우 중요한 사유방식의 하나로 삼은 사람이라고 볼수 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해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며, 진실된 (또는 제대로 된) 사람을 찾으려고 한 모양이다.

전에 학교 동료교수님이 번역하신 개의 문화사에 대한 서양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서는 주로 사냥개를 통한 귀족층이 자신들의 위상을 어떻게 제고시켰는가를 분석한 책으로 기억한다.  유럽에서는 귀족만이 사냥할 권리를 가졌고, 이때 사냥개를 데리고 다녔으므로 이런 분석이 나왔을 것 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내가 2002-3년에 독일 오스나부룩에 머물렀을 때에 관찰한 바에 따르면, 독일인들이 기르는개는 우리가 애완용을 기르는 것과는 달리 사냥개 스타일을 많이 기르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서양의 전통에서 해석한 개를 기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귀족의 상징이었던 개를 이제는 일반사람들도 기를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다.

2003년에 우연한 이웃에서 개를 낳았다고 맡겨서 애완용 개를 기르게 되었는데, 실은 전에는 애완용 개를 기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주로 인간적인 접촉이 미숙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개보다는 사람을 더돌보는 것이 좋지, 돈있는 사람들의 사치라고 생각하였다.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애완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과연 사람도 사랑할 수있을까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기르려고 보니, 난감하였다.  내가 과연 개와 어떻게 한집에서 같이 자고 먹고, 얘기하며 지낼 수있을까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도움말을 해주기를 그냥 사람들에게 말하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지내라고하였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정신병자도 아닌데 사람이 아닌 개에게 사람을 대하듯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과연 개가 내 말을 알아들을까에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 개와 사람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이에 따라 서로 이해하면 지낼 수 있다는 점을 많이 깨닫고 있다. 또 오줌 가리는 것, 밥을 주는 것, 바깥에 산책나가는 것, 아픈 것, 배고픈 것,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잘해주는 사람에게 달려드는 것,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마치 어린 아이를 기르는 것 같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말을 정확하게 알듣지는 못해도, 말의 결을 알아듣는지, 자신에 대해 기분 나쁜 얘기를 하면 곧 숨어버리려고 한다.  또 누구에게 잘못해서 혼 날것 같으면,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가서 안길려고 한다(보호받으려고 한다).  어찌 보면 사람보다도 더 정답게 의사소통이 되는 것 같다.  사람은 여러가지 위선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지능이 낮고 힘이 약한 개는 스스로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때로는 자신의 불만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도 하여 아무튼 의사소통을 비교적 순진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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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가 임금노동자가 되다

역사 2009. 3. 18. 08:19
19세기 노동자들의 삶을 보노라면,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단축, 그리고 임금의 향상이라는 문명의 진보를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의 진보라는 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수의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을 곧 알 수 있다.  즉 소위 자유 노동자들 또는 자유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이나, 당시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서술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귀족이나 지주계급은 아니었고, 이제 장거리 무역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기 시작한 이들, 그러면서도 봉건의 속박에서 풀려난 계층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였다.

노예들에 비해서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나 삶이 나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일수도 있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19세기는 전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노예제도가 철폐된 시기이다.  물론 프랑스는 조금 일찍, 미국은 남북전쟁을 통해서, 그리고 조선은 갑오경장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예가 조선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있었고, 미국의 경우에도 이미 19세기에 접어들면 아프리카에서 들여오는 노예의 수도 격감하고, 그 값도 비싸진 상태에 있게 된다.  따라서 노예제도의 폐지와 별도로 실질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노예제도는 존속하기 어려워진 상태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사건을 이해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동시간의 역사에서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것은 중세시대나, 원시사회가 근대 문명의 발전단계보다 훨씬 적은 시간의 노동과 풍족한 삶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짧은 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노예 상태에서 하루에 12시간이 넘는 해가 뜨면 일하기 시작하고, 하가질 때까지 일하고, 겨울에는 초롱불을 켜놓고 적어도 15분씩은 추가로 일하는 상태가 근대 초기의 모습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는 19세기 초에 들어서서 하루 12시간 노동을 주장하는 노동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19세기 초 이전에는 12시간 노동이 대부분이었고, 19세기 초에 일부 선진적인 자각을 가진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제한을 말할 때에도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의 상태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부녀자, 아동 가릴 것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ㅏ.

가장 심한 착취가 일어나고, 가장 일찍 근대 공장이 발달한 영국에서 비로서 정책적으로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부녀자 노동, 아동 노동에 대한 규제를 시작한 것이 12시간 노동제의 도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를 새도 없는 부녀자, 어릴 때부터 공장에 들어와 10살이 넘으면 늙어버려 생식 능력이 사라져 버리는 아이들을 두고는 건강한 노동자를 다시 생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말로만 자유노동자이지, 실은 노예의 특징과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  노예제도가 유지될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아무리 쾌적하고 일생이 보장되는 삶을 누린다해도 노예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없었고, 결혼의 자유도 없었고, 그래서 가능하면 자신의 일대에서 이승의 고통이 종식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노동시간은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하루임금제도를 채택한 곳에서는 하루에 가능한한 많은 시간을 일을 시키는 것만이 고용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태양이 오래 떠서 오랫동안 일을 시킬 수있는 여름에는 하루 임금제도를 채택하고, 낮이 짧은 겨울에는 성과급제를 실시하였다.  오늘날 5월 1일이 노동절이 된 것은 미국에서 1886년(?)에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실패하였다.  현대인들은 일에 중독되어 사는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주로 미국, 영국의 청교도들이 만들어낸 관습이다.  일어나서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일을 하는 것은 청교도들에게는 하나의 하나님의 소명처럼 여겼다.

현대인들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일을 많이 하고, 돈을 적게 버는 사람이 일을 적게하는 사회라고 미국의 사회학자들은 그들의  사회를 관찰하고 주장한다.  아마도 미국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분명히 과거에 비해서는 노동에 대한 관념과 여가에 관념이 서로 경쟁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조선은 아직 19세기에 그다지 시간에 대한 관념이 발달되어 있지 못했다.  일본에 지난해 말에 방문해서 오오다와라 성의 박물관에 가보니, 일본인들은 에도시대에 휴대용 해시계같은 것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시간관념이 일찍 발달한 것을 알 수있다.  우리의 경우에 조선시간 조정의 시간관념은 아직 아침부터 일찍 3-4시간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오락으로 보낸 것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현재의 근무체제와 조선시대의 관료들, 아니면 공식 기관의 근무체제는 많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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