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사회와 시장경제

역사/19세기 2009. 4. 7. 14:21

19세기의 서양문화사를 보면 명백하게 흐르는 두가지 갈래의 논의가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공정성에 대한 논의이다.  때로는 시장경제의 화폐는 신분의 구속을 타파하고 인간성을 해방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시장경제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시장의 평가기준에 의해 그 정당한 댓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가능하게 만든 공장에 대한 찬사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즉 기계적 사고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생각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기존의 인간이 관행적으로 해오던 것들도 이제는 기계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여기에는 바비지나 Ure같은 이들이 앞장서서 이념을 전파하고 실제로 이에 걸맞는 현재의 컴퓨터와 같은 것으로 고안해 내기도 하였다.  물론 우리가 거구 유럽의 박물관에 가보면, 이들이 사용하던, 방직기내의 종이를 이용한 연속기계동작장치, 시계가 일정시간이 되면 여러가지 장난감 같은 것들이 줄지어 나와서 쇼를 하는 모습, 간단한 음악 곡조를 연주하는 기계 등은 이미 산업혁명이전부터 등장하였던 마분지 같은 종이에 구멍을 뚫어 연속동작을 가능하게 만든 장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물론 당시에 다윈의 진화론 그 자체는 종교적인 교의에 젖어있는 이들에게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라서 이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적으로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곧 효력을 발휘한다.  진화론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우생학적으로 백인이 유색인종에 비해 우월하다는 사고를 널리 퍼뜨리고 이를 정책에 곧바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에 백인이 다른 유색인을 상대로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지배하게 되는 현상의 배후에 놓인 논리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2차세계대전시에 히틀러가 우수한 아리아인이 다른 인종을 지배해야 한다는 데에까지 나아가게 만들었다.  19세기 초기에 신대륙에서는 원래의 주인인 인디언을 내쫓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민주주의는 백인들에게만 한하였고, 인디언에게는 이러한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하였다.  인디언이 자율성을 갖는다고 하여도, 다만 당시의 흑인 자유인에 해당하는 자유를 인정하였고, 백인과 동등한 자유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재산권, 기득권, 이주의 자유, 참정권 이 모든 것들이 인디언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왜 인종차별에 기반하여 발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당시부터 시작된 인종차별 또는 사회적 차별은 지금도 제도로서 조직원리로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다만 사람만바뀌고 있을 뿐이다.  즉 식민지시기에는 일본인이 가장 상층의 착취자로서 기능했다면, 그 후에는 특정한 계층이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고 사회의 작동원리는 여전히 과거나 지금이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분업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사회적 차이의 포용이 아니라, 사회적 배제와 차별로 나아가는가에 대해서는 단지 체계의 작동원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역사상의 사회내의 제 세력에 의한 기득권 다툼의 논리가 더 적합할 것이다.  즉 반자본주의적 신분적 질서를 옹호하고 싶은 기득권이 자신들의 지대이익을 추구하려는 현상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진보적인 힘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의 자본주의는 신분적인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경향이 더 강함을 알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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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객고를 푼 기록들

역사/19세기 2009. 4. 6. 21:07
조선시대에도 관료들의 기록을 보면 다모, 관기, 가창자 들이 등장한다.  즉 관료들이 지방에 가면 다모가 와서 방안일을 도와준다.  아마도 부억일, 청소, 세탁을 도와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외의 일을 더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모도 관의 고용인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청에는 또한 관청의 기생이 노비로서 존재했다.  관기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나오는데, 1500년대에 나온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가 유명하고, 임진란 때 동래인가 양산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사랑하던 관기가 와서 같이 싸우다 죽은 사건이며, 진주의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논개도 관기였을 것이다.  관기는 노비로서 바깥나들이를 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유일한 탈출구가 젊고 생생한 관리를 사랑하여 첩으로 들어가 노비를 대신 내는 것이 유일한 신분탈출구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관기는 상대적으로 노래와 춤,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예인의 역을 담당하였으므로, 상당한 정도의 훈련을 거쳐서 교양을 어느정도 갖춘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주로 부른 노래는 시조를 포함하여, 12가사 들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통신사로 가거나, 북경에 연행을 갈 때에도, 각 지방을 지나면서, 특히 압록강이나 부산진의 항구에서 이국의 국경선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때로는 다른 지방에서 만났던 관기들이 와서 이별을 아쉬워 하는 경우도 많았고, 서로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멋진 낭만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노래방에서 도우미 여인들을 불러놓고 질탕하게 놀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까?  다만 아쉬운 것은 일본의 통신사나 북경에 간 연행사들이 그들의 임무를 좀 더 철저히 해서 해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국내의 준비태세를 강화하고, 국내 개혁을 촉진시키는 일을 했으면 좋았을걸하는 아쉬움은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에도 지방의 수령이나 현감이나 아무튼 부하들이 자신을 찾아올때 대개는 맨손으로 오지 않고, 지방의 술이나 고기, 또는 토산품을 지니고 온다.  그럴 때 혹 기생도 동반하여 데리오 오는 경우도 있었던 것같다.  그 중에 한 여인에 이순신이 상당히 빠져 있었던 기록도 나온다.  이순신은 매우 꼼꼼 하여 이를 일기책의 빈자리에 몇번 만났는지도 기록하고, 같이 잠을 잔 다음날에는 모이 피곤하다는 말도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철처히 하는 이순신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인들 외에도 상당한 가창 전문 집단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서울을 중심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후기로 접어들면 지역의 재산가들도 자신의 집에 가창자들을 불려들어 노래를 즐겼다.  초기에는 시조, 나중에는 긴 시조들(가사), 그리고 후기에 접어들면 판소리로 바뀐 것으로 이해된다.  1500년대부터 노래 가사에 나오는 사랑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낭만주의, 개성과 감정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금 더 일찍 유학이 과학과 사실주의로 흐른 후에 낭만주의가 나왔다면 조선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노래가 그냥 현실의 당파싸움, 유학적 현실 구속, 어려운 경제생활에 대한 체념의 한 방식으로 등장했다면 별로 생산적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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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대외관

역사/19세기 2009. 4. 6. 16:56
조선은 1600년경을 전후로 해서 일본이라는 섬나라와 그리고 대륙에 있는 청나라(처음에는 후금, 그리고 나라이름이 변하여 청나라)에 침략을 당하고, 많은 이들이 전쟁노예로 이들 나라에 끌려 갔다.  우리 지역(창원, 함안, 웅천)에는 주로 임진왜란와 정유대란때 일본의 남쪽지역(오사카)으로 끌려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을 조선으로 송환하려는 움직임이 조선 정부차원에서 통신사로 갈때마다 이루어지고, 상당수의 포로들이 송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한편 벌써 1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설사 일본에 노예로 끌려갔다고 하여도, 조선에 돌아올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이미 정착한 일본에서 이미 가족을 형성하였으므로 그대로 살게된다.

일본은 당시에 이미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고 있었고, 왜구라는 이름으로 중국 남부해안가,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무역에 진출하고있었다.  1600년대의 덕천 막부에서도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지속하였고, 남부 중국 해안가와는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체제도 우리보다는 훨씬 질서있고, 문화도 발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세계지도를 갖고 않았던데 비해 일본은 이미 세계지도를 갖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의도적으로 일본은 미개하고, 조선은 소중화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지만.  특히 1763-4년에 일본에 통신사로 간 조엄과 김인겸은 그들의 일본 기행 기록을 통해 일본의 문물이 발달하였고, 이를 조선에 도입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조엄은 고구마를 도입하고, 뒤이어 수차(물레방아, 관개시설) 같은 것도 도입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그것이 제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1866년에 청나라 북경에 간 홍순학은 그의 나이 57세에 국가 책무로 갔으면서도, 압록강을 건너면서 부모님 슬하를 떠나는 것, 그리고 경기지역을 떠나본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6개월에 걸쳐 북경을 다녀오면서 안전부절못하고, 북경에서 본 것은 강대국 청나라를 본다.  그러나 생가해 보면, 당시의 청나라는 아편 전쟁을 두차레 겪고 난후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공격에 완전히 쑥대밭이 된 상태였다.  이 중요한 시기에 북경을 갔으면서도, 국제정세파악은 제대로 보지못하고, 부모슬하를 떠나는 것만 걱정하는 모습을 본다. 

오늘 나는 세계지도를 본다.  북한이 쏘아올린 3단계 로켓 발사체가 어디에 떨어졌는가,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미국은 핵무기 확산저지의 기회로 삼고 있고, 일본은 해외팽창을 위한 군대보유를 금지한 헌법의 개정의 기회로 삼고 있다.  우리는 7월에 고층의 외나로도에서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것이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은 미사일 300Km이상의 사거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북한을 자기네 경제권 내에서 통제하려 할 것이고, 러시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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