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19세기 2009. 3. 31. 16:08
19세기 전반기가 서구 열강들이 자국내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의 해결에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되어, 내부적으로 그 해결방식을 찾았다면, 19세기 후반기는 자국내의 문제를 세계적인 차원에서 해결을 시도하던 시기였다. 즉 19세기 전반만 하여도, 식민지 제국들은 먼곳에 있었고, 그곳에서 서구 열강의 내부로 영향을 그다지 크게 미치지는 않았다. 다만, 유럽(구대륙)에서 신대륙(미국)으로의 이주, 흑인노예의 이주, 인디언 학살,인디언들과의 혼혈 정도가 인종간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이는 사실상 내부적인 문제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부에서 남북 전쟁이라는 내전이 발생하고, 뒤이어 미국은 미시시피 강을 넘어 서부로 서부로(방향이 서부라는 말이지 지형적으로 보면 현재 미국의 중부에 해당한다) 개척하는 시기였다, 철도로 대륙이 연결되고, 목화 프랜테이션, 그리고 북동부 지역(뉴 잉글랜드지역과 새로운 접경)에 신흥공업도시가 발전하면서 대규모의 이주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이중 플랜테이션에는 흑인 노예들이, 북동부의 지역에는 대부분 구대륙의 이주민들이, 그리고 철도 연결을 위해서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대거로 이주하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 미국 내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이주민들은 이미 정착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미국 정치를 지배하고있는 이들에게는 이들 피지배계급이 어느정도 분열되어 있는 것이 통치에는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이미 발전한 다윈의 진화론에 빗대어, 사회적으로도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으로서 사회적인 경쟁에서의 승자를 합리화시켜주는 이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사람들도 대부분, 흑인, 이주자, 인디언을 포함하는 민주주의를 주창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논할 때,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 노예들이 제외되었듯이, 대부분의 사회 하층민은 배제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문제는 이것이 겉으로 보면 단순히 인종주의적인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종주의가 그 원칙대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종주의란 사회적으로 차별을 합리화시키는 하나의 이념적 도구일뿐이지, 백인이라고 누구나 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19세기는 미국 신대륙에는 구대륙에서 기근을 피해(아이랜드의 감자기근), 또는 1948년의 노동자 폭동을 피해 온 사람들, 또는 일확천금을 꿈꾸고 온 이들, 종교자유를 위해 온 사람들 등 수 많은 각자의 동기에 의해 피신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기존에 살던 주로 WASP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남북 전쟁후에는 남부의 사람들이 북부의 사람들에 의해 차별을 많이 받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에 이러한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물론 나중에는 중국인들이 무척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중국인들을 철도노동자로 들여온 거의 직후부터 차별적인 법률들이 계속해서 제정되었다. 이점은 최근에도 캘리포니아에서 영어 공용화법안을 통과시켰다가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불법으로 판정받은 것을 상기하면 알 수있다. 즉 주 정부의 차원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이 계속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면된다. 인종주의적 차별이 미국에서만 발생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인종주의적인 정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슬람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는 스카프를 학교에서 금지시키고 있다. 프랑스를 말할때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킨 나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민족주의적인 민주주의가 당시에도 모든 나라에서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초기에 환영을 받았고, 독일에서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었고, 스페인에서는 초기에는 상당수의 진보적인 인사들이 환영하다고 결국은 다시 적대적으로 돌아선다. 즉 프랑스의 민주주의 역시 민족을 우선시하는 민주주의였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1950년대, 그리고 1962년에 해결된 아프리카 알제리아 독립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민주주의가 민족과 결부되고, 인종주의와 결부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를 정당화한 이념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조선말기의 선각자들도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부국강병론을 주창하였다. 물론 부국강병을 제대로 실행할 능력도 없었지만, 부국강병론 자체가 바로 제국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의 우리도 역시 서구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무한 경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다음에서 보겠지만, 경쟁은 탐욕과 차별에 근것한 경쟁이었다.
역사 2009. 3. 29. 08:11
제목이 자칫 인종주의적인 표현이다. 물론 모든 백인이 모든 인디언과 흑인의 희생위에서 자유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상당수의 백인들도 노예, 특히 채무 노예로 살았고, 유럽대륙에서도 채무 노예와 동부 유럽에서는 농노가 발달해 있었다. 그러나 주요한 흐름, 즉 대채적인 흐름은 아프리카의 서중부의 해안가에서 잡해온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유입되었고, 이들이 남미의 광산과 북미의 목화 플랜테이션, 아니 더 나아가 북미의 공장지대에서도 노예들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혹자는 노예는 아주 오래된 전통적인 제도이므로, 노예가 신대륙으로 유입된적이 그리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부족간의 전쟁을 통해 잡혀서 거래되었고, 실제로도 신대륙으로 백인 상인들에 의해 팔려간 흑인 노예들도 이들 아프리카의 부족들간의 내지 거래를 통해 수집되어 수송된 것은 사실이지만,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수요가 대규모의 노예를 만들어 낸 것만은 사실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동인은 자본의 등장, 돈을 버는 돈의 등장이다. 즉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착취가 가능한 수단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임노동이 추상적인 논리에서는 자본주의의 착취의 기본 원리인 것으로 보이지만, 노예 노동이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도 말할 수있다. 특히 영국이나 미국, 유럽대륙의 일부 발달한 자본주의를 제외하고는 노예노동이 가장 기본적인 공장노동 또는 플랜테이션, 광산 노동의 형태였다고 까지 말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등장은 상당수의 백인들이 농촌에서 쫓겨나고, 도시에 몰려들어 무산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중 성공한 이들이 임노동자가 되었고,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자유노동자, 채무 노예가 되어간다.
흑인 노예들은 실제로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졌다. 영화 만딩고를 통해 보면 잘이해할 수 있듯이,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잡혔다고 다 신대륙으로 끌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상당수의 국가들이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노예 제도 자체를 금지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노예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한다. 즉 공식적인 금지가 현실적인 금지는 아니었고, 오히려 증가한다는 말이다. 잡힌 노예들 중에서 가장 일을 잘할 것 같은 흑인들만 노예로 팔려간다. 실제로 노예들의 키를 기록한 것에 따르면,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들은 당시의 백인들보다도 키가 더 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인한 노예들도 보름내지, 한달정도 걸리는 신대륙으로의 여행에서 거의 선반에 쌓아놓듯이 운반하는 체제에서, 똥오줌을 가릴 수 있는 화장실 시설도 없었기에 상당수 아마도 30-40%정도는 죽거나 병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노예 장사가 이익이 많이 나기에 상당히 성행했던 것 같다.
남미의 경우에는 일찍이 노예제도가 발달하여, 광상이나 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노예가 많은 도시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노예가 전체 도시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도하였다. 노예들중 일부는 채무를 갚거나, 노예들도 백인과 결혼하여 새로운 신분이 상승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순수한 백인들 보다는 백인과 결혼한 흑인들이나, 인디언들도 상당수의 노예를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 노예를 거느리는 수는 많게는 수백명씩 거느리면서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20여명을 거느리고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노예가 삶에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즉 가내 노동을 위한 노예도 상당수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소작제도나 임차농이 발달해 있었다. 소작제도는 대개 수확량의 1/3을 지주에게 주고, 1/3은 농지 경작의 비용으로, 나머지 1/3을 소작농이 갖는 제도였다. 따라서 미국의 소작제도도 조선에 비해 전혀 착취의 정도가 적은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더 심한 착취제도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차지농은 땅을 돈을 주고 빌려서 농사를 짓는 제도이다. 공장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회사로부터 채무를 지게되고 이러한 채무는 자섹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어 결국 대를 이어서 채무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제도는 미국에서도 거의 196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법률적으로 불법화되고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 2009. 3. 26. 18:05
19세기 서양사는 대체로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도시와 시장경제라는 무대에 등장하면서, 착취와 저항, 은폐와 드러내기, 즐기기와 억압이 뒤얽히면서 정치적인 타협과 대결, 그리고 자유와 탄압이 지속된다. 물론 그 중심적인 영역은 개인들이면서, 동시에 한 가족의 적응, 그리고 이웃과의 연대전략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뒷받침에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영국의 노동자 생활을 연구한 톰슨에 의해 분석되는 것을 차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같이 임노동자라기 보다는 양반계층, 귀족 계층, 상인층, 장인(제조업자), 공장노동자, 자유로운 노동자 들이 얽혀 있었던 시기의 일반 평민들의 삶을 분석하는데에는 한층 더 유용한 것이다.
개인들의 처지 역시, 임노동자라는 표현보다는 무산자 계층들, 즉 점차 공장이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제조업자들의 힘에 눌린 장인층들(소규모 자영적인 성격을 가진 제조업자들), 장인층의 아래에서 기술을 배운 숙련노동자들, 또는 이미 기계가 들어오기 전의 공장에서 숙련을 가지고 있었다가 기계가 등장하면서 어린이와 부녀자들에게 일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숙련노동자들, 단순한 저임 노동자들, 도시에 왔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비공식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자유노동자들 모두가 아니, 농촌에서 도시로 가기위해 대기하고 있는 소농 소작자들 역시 무산자 층에 속할 것이다. 이들 모두는 19세기의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시장경제체제에서 그 고통에 적응하고, 타협하고, 저항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 개인에게 결혼은 과거의 농촌시절과는 달리 어느정도의 사회적응과 돈벌이가 가능해야 혼사문제를 풀수 있기에 결혼연령은 늦어 질 수 밖에 없다. 또한 결혼 역시 하나의 가족 생계전략을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 키가 크고 영양이 풍부하다고 인정되는 여성은 일찍 좋은 조건에서 결혼 기회를 가질 수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결혼기회가 협소하였다. 여성의 신체와 결혼을 연구한 논문(영국의 사례)에 따르면, 신체의 크기는 과거의 영양상태를 표시해주고, 또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후에도 공장에서 채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의 일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육체적인 강인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허약한 육체 보다는 강한 육체조건을 선호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증거를 임금이나 채용가능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가족은 아직도 말이 부인들이 노동한다고 하였지만, 부인들이 노동에 나서는 것은 거의 최후에야 나서는 것이었고(미국의 사례), 우선적으로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노동에 나서서 가족의 생계에 도움을 주어야 했다. 우리의 1960년대에 농촌의 처녀들이, 그리고 소년들이 중학교와 일하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태와 유사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도시에서는 자기 집이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하숙을 통해서 가족의 생계에 도움을 주려는 전략이 우세하였다. 부인들이 노동에 나가는 것은 거의 최후의 수단이었고, 이런 관행도 19세기 후반이 되어어야 가능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인이 공장이나 노동에 나서는 경우에는 주위의 온갖 멸시에 시달려야 되는 상황이었다. 에밀 졸라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들이다.
군중들은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놀이를 조직하고, 공동체에서 지주(젠트리)나 자본가(제조업자나 상공인들)을 야유하는 축제가 발달하였지만, 19세기 중반이후에 접어들면, 노동자들의 놀이는 이제 자본가의 상품 영역속으로 편입되게 된다. 즉 개별화되고, 상품화되고, 조직화된다. 따라서 개인간의 사적인 상호작용은 줄어들고, 영화나 프로 스포츠를 즐기게 됨으로써 활동적이고 스스로 만들어낸 여가를 즐기기는 어렵게 되었다. 즉 노동자는 오히려 여가를 즐기기 위해 다시 노동을 더 해야하고, 이웃들보다는 고립된 상태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시간 단축을 논의할 때 왜 사람들이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 하지 않고, 더욱 많은 노동을 통해 화폐임금을 획득하려 하나고 질문하면, 대개는 쉬는 시간에 돈이 없으므로 할일이 없다고 한다. 바로 서구로 따지면,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공동체적인 놀이가 사라지고, 돈에 의해 여가가 향유되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