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과 가내공업이 의존해서 발달한다.

역사 2009. 3. 13. 11:50
19세기 서구의 산업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면적인 분석을 피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는 우리가 보통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주요한 항목들이 전체 사회를 지배하면서 전일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것이 비자본(또는 전자본)주의적과 결합하고, 서로 이용하고 착취하고, 수탈당하는 가운데 확산되고 수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저발전의 발전이나, 세계체제론의 관점 또는 역사적 발전으로서의 자본주의라는 관점에 잘 나타나고 있다.  서구의 공장체제의 발전과정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벌어지고있는 공장내 하청, 파견노동, 소사장제, 외부하청, 또는 과거의 선대제와 비슷한 방식까지 실은 전자본주의나 비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항상 불가피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영국의 산업발전은 이미 1600년대부터 시작되어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웠다.  특히 모직산업이 발전하여 양을 키우고 이를 이용하여 옷감을 만들고 옷을 제작하였다.  옷을 제작하는 의류산업은 대부분 매우 영세한 가내 수공업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공장이라는 것은 아직 증기기관이나 전기가 도입되어 기계를 움직이는 형태라기보다는 풍력이나 수력, 또는 동물의 힘을 이용하여 기계를 돌리는 형태였다.  물론 기계의 도입은 상대적으로 17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시작되지만 점진적으로 기계화가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당시의 공장제도는 물론 장인과 도제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힘은 1800년대 초반되어서야 꺽이고 심지어는 소위 기계파괴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1800년대 초반 이전의 단계는 장인과 도제에 의한 생산이었다고 한다면 1800년대 초반에는 기계가 도입되어 장인과 도제가 아닌 새로운 기술과 숙련제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장 노동자들이 숙련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도제제도는 아닌 새로운 형태라는 점이 중요하다.  기계는 여전히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었고, 상당정도는 어린이나 부녀자와 같은 힘없는 사람이거나, 농촌에서 갓 올라온 이농자가 고용되어도 쉽게 적용할 정도도 있었지만(맑스나 엥걸스가 묘사한 바 처럼), 상당수의 노동자들은 숙련과 교육을 통해 높은 생산성을 올림으로써 이들에 의존한 공장운영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1820-30년대는 따라서 영국에서는 공장과 계급, 그리고 정치제도의 전환기에 해당한다.  공장내에서는 장인의 와해와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분화, 장인의 노동자 계급화, 숙련노동자의 고임금화, 저숙련노동자의 비참한 생활, 사회적 불안에 따른 영국의 선거법 개정(평등을 강조) 등이 그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 모직이 아닌 면직 산업의 발전과 괘를 같이 한다고 볼수 있다.  즉 미국 남부지역에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의 목화밭이 형성됨으로써 이제 값싼 옷감을 만들어 낼수 있는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미국은 1800년대 초반만 해도 아직 공장이 발전하지 못했지만, 중반 후반에 접어들면서 서구 유럽대륙에서 저임 노동력, 기존 계급관계나 관습에 때 뭍지 않은 참신한 노동력이 등장함으로써 기계화, 대규모 공장 경영이 가능해지고, 노동자들의 단결보다는 새로운 기회를 선호하는 노동자 군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미국은 바로 소수의 인종적 노동자들의 저항을 제외하고는, 인종적 분열과 과거 경험과의 단절이라는 상황 속에서 자본가들이 손쉽게 노동자들을 수취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된다.

따라서 19세기말에 이르르면 미국은 서서히 철강산업이라는 든가에서 근대적 경영기법이라 불리우는 기계제의 도입과 이에 따른 작업제도의 개편이 장인노동자들의 저항 없이 진행되게 된다.  경영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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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 노동에 대한 논쟁과 조사를 자극했다.

역사 2009. 3. 12. 14:06
19세기 유럽의 역사에서 노동자에 대한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다.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던(현재 우리는 세계의 공장이라는 표현은 중국을 가리킨다) 영국은 숙련 노동자, 그리고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 숙련노동자들의 해체, 유년, 부녀 노동자가 등장한다. 장시간의 노동시간뿐만이 아니라, 이들 가구들이 빈곤에 허덕이며, 부랑자와 거지가 들끓고, 도덕적 타락을 목격하게 된다.  이럴때 정부와 일부 선량한 자본가들이 돈을 내어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사를 개시한다.  정부가 한 것의 유명한 것들은 1900년대 초반이 이루어져서 나중에 맑스의 자본론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영국에서 새로운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입안하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현실을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이중적으로 진행된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적 전략으로 후진 식민시장을 통해 노동자들이 혜택을 받아 실질임금이 올라가는가 하면, 심지어는 상층 일부에 대해서는 나중에 레닌에 의해 노동귀족이라고 불릴 정도의 상류계층이 등장한다.  반면에 전반적인 노동자들의 상황은 특히 해외에서 이민자들이나, 농촌지역에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은 비참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이때 영국의 해운회사를 운영하는 Booth는 영국 런던의 빈곤을 조사하는 대규모 프로잭트를 시행하고 책으로 17권을 펴내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르 쁠레가 사회조사를 시행하게 된다. 물론 소설가 에밀졸라는 광산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과 저항을 그리는 소설 레미저라블을 저술하기고 한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의 시기는 사회적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기이다.

상당수의 자본가들도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일에 돈을 내어 놓는다.  카네기 재단이 설립되고, 폐결핵을 고치기 위한 자선사업이 진행된다.  그럴정도도 자본가들이 보기에 노동자들의 재생산이 어려울 정도로, 아니면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질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노동자들의 생활이 비참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우리는 현재 맑스의 자본론, 엥겔스의 1844년의 영국 노동자들의 생활상태, 또는 후에 1963년에 쓰여진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통해 당시의 영국 노동자들의 상태의 일부분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회조사를 정책에 사용하는 관행은 이후 특히 도시의 빈민층이나 주택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사회조사운동"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사회학에서는 1930년대 초반에 발표된 라자스펠트의 오스트리아에 있는 한 마을의 실업 상태를 현지 관찰과 각종 자료로 조사한 것으로 휙기적인 사건으로 치고 있지만, 이미 이전에 상당한 향의 조사 자료와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있다.

같은 시기에 레닌은 제 2 인터내셔날이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서 민족주의, 또는 기회주의, 수정주의 등으로 흐르는 원인을 분석하면서, 결국은 제국주의 강국 내에 있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식민지국가의 노동자와의 구분을 시도하게 된다.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동귀족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노동자 계급내의 높은 소득을 받는 계층이라는 것 뿐만아니라, 이들이 경제주의, 편협한 자기이익주의, 상류계층을 모방하는 관행을 발전시킨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런데 레닌은 이를 넘어서서 이것이 노동자들의 국제연대, 아니 국내 노동자들의 대동단결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현실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문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태도, 그리고 최근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발생한 많은 노동조합이 이명박이 싫어하는 자신들의 사장을 내 쫓는데 동조하는 현상을 보면서 우리의 노동자들도 레닌이 말한 노동귀족적 경향이 매우 강하구나하는 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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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비용이 경제성장을 좌우한다.

역사 2009. 3. 6. 08:17

제도경제학자들이 새로이 해석하는 경제성장의 동력은 단순한 요소 투입이나 생산성이 아니라, 물적 제도적 거래비용의 절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자유로운 시장 거래라는 개념일 뿐만아니라, 서로 모르는사람들이 만나서 장기적인 물적 거래 또는 신용거래를 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만드는 데 있다.  물론 모르는 사람들은 상호간에 신뢰하고 믿음을 갖고 거래하기보다는 속이고 단기적인 이익을 갖고 떠나는 것이 유리한 전략일 수 있다.  또는 계속 시장에서 거래를 한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거래 상대자를 바꾸거나 장기적인 속임수를 쓸 가능성이 높다.

이런 불신 가득한 시장거개를 방지할 수 있는 주체는 거래 상대자들이 아니라 국가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즉 국가가 지속적이고 신뢰할 만한 시장거래를 확보하기 위한 기준의 확보, 이를 규제할 수 있는 감시능력, 기록, 사후적인 처벌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 시장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19세기에 세계 여러나라가 모두 경제성장 전략을 취했을때 왜 초기에는 영국이, 후기에는 미국이 경제성장에 성공했는가를 밝힐 때 이러한 논리를 적용하기도 한다.  단순하고 모든 거래 당사자들이 이해할 수있는 기준(규율, 법), 법을 어겼는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물건에 대한 측정,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능력), 감시한 결과를 기록하고 분류하여 처벌이 가능하고 반복적으로 기준을 어긴 사람에 대한 과중한 처벌을 할 수있는 국가의 능력(관료제의 발달), 처벌할 수 있는 사법체계, 관료들을 통제할 수있는 국가의 능력, 정치쳬계에서 민주적으로 각계각층이 참여함으로써 기준을 시장거래를 원활하게 하고 행위자들이 이를 정서적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가는 세금을 통하여 국가체제를 유지한다.  그러나 대부분 세금이 많이 걷혀도 관료제를 비효율적으로 운영하면 이들을 운영하느 데 들어간다거나, 관료제 자체가 매우 자의적으로 운영되어 부패가 만연하게 된다.  조선조 말기의 사회는 수령이 곧 법률집행기관이었고, 왕조는 국가와 왕조를 구분하지 않고, 재정을 운영하여 왕조조차도 국가 재정을 책임지지 않았다.  즉 국가는 빈곤하여 군대도 관료제의 운영경비도 마련하지 못하였지만, 왕조는 여전히 궁궐을 짓고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사치와 허례에 많은 비용을 지출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료들이나 수령들도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각자의 권한을 갖고 자의적으로 수탈하는 체제였다.  따라서 조선조 말의 상황에서는 새로운 사업이나,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었고, 너무나 많은 수탈이 있었으므로 이를 넘어서기 위한 사업(경제성장의 기반)을 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마찬가지로 스페인은 1500년경에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장거리 식미지를 지배하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들었다. 현지의 지배체제를 위임하지 못하고, 본국의 왕조가 직접 지배함으로써 원격 식민지의 관료체제를 통제하기 위한 각종 복잡한 규칙들을 만들어 내었다.  많은 규칙은 정교한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각종 피할 수있는 예외적인 조항이 많아지고,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관료)에 의해 자의적으로 운용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스페인은 지주들(공업원료 생산자, 길드)이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외부의 새로운 진입을 억제하는 효과를 보였다.  따라서 초기의 강력한 제국은 그 활력을 잃고 네덜란드, 영국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반면에 미국은 단순한 법률체계를 기반으로 서부 개척에 나섰고, 정치적으로도 사회환경적으로 신규 인력에 의한 , 그리고 신규 자본들이 투자하는데 거래 비용이 들지 않았다는 점을 미국의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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