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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009. 3. 5. 11:14
19세기는 국가나 시장의 측면에서 팽창, 침략,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 시작된 해였었다. 이전의 사회는 단순히 국가의 야욕이나 기후 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변화에 의해 민족의 이동과 이민족의 침략이 행해졌다면, 19세기 접어들어서는 마치 침략이 국가나 한 사회경제의 생존조건인 것으로 드런나 시기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를 뒤밧침하는 이론들이 진화론, 약육강식, 시장경제론(분업과 무역에 의한 상대적 이익), 문명화 이론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 혹자는 유럽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라고 명칭을 붙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럽이 왜 팽창을 자신의 중요한 생존전략으로 내세웠는가에 있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유럽이 해외 식민지 경영에 나섰다고 하여도, 이들의 식민지 경영은 실제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원료공급지로서의 천연자원의 수탈, 제조업 공산품 시장의 개척, 금융자본의 투자처로서의 기능은 미흡했다고 주장하고, 오히려 이들 국가에 시장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기반 투자에 많은 돈이 들었다고 주장한다. 즉 도로나 철도의 건설, 항구와 공항, 이를 유지하기 위한 군대의 고용 등에 많은 돈이 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강대국들은 서로 상대국들끼리 무역양이 많고 식민지 국가와의 무역량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다. 양이 적다고 중요치 않다는 주장은 임계점, 위험 회피 장의 마련, 통제 가능한 경제 영역의 구축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즉 식민지라는 것이 산업선진국의 주요 무역 상대는 아닐지 몰라도 이들이 없으면 안전하게 다른 강대국과 경쟁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경쟁을 위해서는 내적으로 기술개발이나, 제도 혁신, 자본투자, 노동력의 강화나 외연적 확장을 통해서 경쟁을 해야 하는에 이는 사실상 쉽지 않은 전략이다. 따라서 손쉽게 이를 강요할 수 있는 방식은 식민지에서 아주 값싸게 원료를 수탈하거나(강압적인 방식이나 사기적인 수법에 의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내적인 혁신을 이루어내는 것보다 휠씬 값싼 방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구 제국들이 19세기에 해외 식민지 쟁탈에 사활을 건 것은 그들 서구 제국끼리의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전략이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것을 당하는 나라나 공동체, 인간들은 노예상태로 빠진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 서구 내부에서도 모든 이들이 산업혁명의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 상당수의 프롤레타리아트들(임금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의 상승이라는 혜택을 받는다. 19세기 전반의 전반적인 기술 숙련 장인 노동자들의 지위가 약화되면서 농촌에서 풀려나온 1세대 임금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신분상의 구속에서 해방되고 어느정도 살만한 임금을 받기 시작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자본가들 역시 소규모 수공업적인 자본가들이 이제 상당한 자본을 투자하여 기계와 설비를 설치하여 장기적으로 체계적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기술을 배워나가야 했다. 벌써 19세기 후반되면 독점자본가들, 대규모 자본가들이 나타나 이들이 서구 사회의 국가정책을 요리하고, 노동자들의 탄압에 앞장서기도 하고, 때로는 자선단체를 만들어서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대학들도 세우고, 재단도 만들어서 너그러운 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역사 2009. 3. 4. 07:28
19세기는 서구 열강세력들이 본격적으로 국가를 병합하여 직접 통치의 시대로 접어든 시기이다. 이전에는 무역 독점이나, 동인도 회사, 서인도 회사를 통해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였지, 한 국가가 직접적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미국은 1894녀부터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을 뿌리를 내리고 있던 스페인을 내쫓는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자 독립운동을 벌이던 필리핀인들은 미국과 손을 잡고 필리핀에서 스페인을 축출하는 전쟁에 참여한다. 마침내 미국은 필리핀에서 스페인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서 미국은 같이 손잡고 스페인을 축출했던 필리핀인을 상대로 1898년에 압도적인 무력의 힘으로 살륙을 감행한다. 당시에 미국의 국회에서는 특히 상원에서는 필리핀을 지배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미국이 스페인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 중에 하나가 필리핀은 순진하지만, 자치 능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세한 문명을 가진 백인이 특히 앵글로 색슨인이 무지한 필리핀인을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주장이었다.
영국이 19세기 말에 인도를 병합하는 시기에 접어들어서, 인도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문제로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인도는 무슬림인 무굴제국에 의해 지배되던 국가체제를 갖고 있었다. 영국식민당국들은 무슬림과 힌두인들을 분열시키고, 상호 반목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지배를 지속시키려는 전략을 적절히 구사하고있었다. 즉 작은 단위의 마을이나, 지방에서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통치체제는 수립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곧 의도했는지, 아니면 의도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무슬림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2차세계대전 후에 인도대륙을 파키스탄, 버마를 분리 독립시킴으로서 해결된다. 지금도 방글라데쉬, 인디아, 파키스탄의 갈등과 대립이 격심한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갈등일 뿐만 아니라, 식민 강대국들이 이를 조장하고, 지원함으로써 더 커졌다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당시에 영국은 소수인 무슬림을 지원하여 힌두교들의 독립을 막았던 것이다.
프랑스도 아프리카 중 북부의 서편에 대규모로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도 역시 프랑스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말에도 프랑스 내에서 과연 식민지배가 프랑스의 헌법정신과 일치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결론은 지배하는 것이 무지한 사람들을 계몽하는 것이므로 신이 부여한 의무라는 것으로 나온다.
나는 아직도 종종 서구인들이 우리들에게 순진하다, 친절하다 라는 말을 자주하고 이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많은 것에 대해 놀란다. 순진하다와 친절하다라는 말은 합리적인 계산을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제대로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서구인들에게 순진하다는 표현은 바보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자신의 이익을 지킬 줄 알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행동과 안의 감정을 일치시키는 훈련을 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 1945년 직후에 한국을 지배한 맥아더 장군은 한국민들은 아직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때 도 같은 이유였고, 1980년 광민주항쟁때에도 당시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이 한국인은 쥐와 같아 조금만 동요가 있었도 가장 먼저 도망간다고 지적한 일이 있다. 우리의 현재는 어떤가? 지나치게 친절하고, 강자에게 굴종하고, 약자에게는 거만한 그런 태도를 지닌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행동과 감정을 표출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절실한 때이다.
역사/19세기 2009. 3. 3. 15:45
미국이 한반도에 접촉한 사건들
1852년(철종 2년) 음 10월에 미국 포경선이 황해도 해주에 표착하다.
1866년(대원군 집정기) 음 7월에 미국 상선 제네랄 셔먼호, 평양에서 관민의 공격으로 전소되었다.
1868년(대원군 집정기) 음 3월에 미국의 군함 쉐난도아 호가 2년전 셔어먼 호의 생존자 수색을 위해 오다.
1871년(대원군 집정기) 음 4월, 淸나라 주재 미국 공사 로우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와 함께 군함 5척을 거느리고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 미국군은 강화도 광성보를 점령하였다(신미양요). -> 지난 1996년(?)에 미국 와싱톤의 펜타곤(국방부 건물)의 지하에 지하철 역이 있다. 내려서 펜타곤을 관광하러 들어 갈수 있다. 물론 금속탐지기 같은 보안장치를 통과한 후에 들어갈수 있다. 이곳의 2층의 벽에는 지금까지 미군으로서 해외에서 미국을 위해 죽은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곳에 한국전쟁 Korean War이라고 쓰여져 있다.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알고 읽어보니 바로 신미양요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때 미국은 광성보의 장수기를 빼았았다. 크기는 가로 세로 3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장수기를 빼앗긴 치욕, 그 후에 미국이 한국에 반환하여 현재는 전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880년(고종 17년) 음 3월, 미국 해군준장 슈펠트, 군함 티콘데 로가호로 부산에 와서 통상을 청하다. 동래부사가 이를 물리치다.
1882년 (고종 19년), 음 4월 한미수호조규를 조인하다.
1883년 (고종 20년), 음 4월 미국 공사 프트가 착임하여 수호조교를 비준교환하다.
1885년 (고종 22년), 음 2월 미국 의사 알렌을 초빙하여 광혜원을 주관케 하다.
음 9월 미국인 메일을 총세무사에 임명하다.
1886년 (고종 23년), 음 3월 미국인 데니를 내무협판에 임명하다.
음 6월 미국으로부터 교사를 초빙하여 육영공원을 세우고 어학과 양학을 가르치다.
1888년 (고종 25년), 음 2월 鍊軍(군사 훈련) 교사 미 육군 소장 다이 등 3명이 내조하다.
1890년 (고종 27년), 음 4월 미국 해군 50명으로 궁권을 호위하였으나, 청나라의 항의로 철수하다.
1891년 (고종 28년), 음 6월 미국인 내무협판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 어선들의 제주도 출항 금지를 교섭하게 하다.
1892년 (고종 29년), 음 4월 미국인 모스를 초빙하여 철도부설을 계획하다.
1896년 (고종 33년 건양 1년), 양력 3월 미국인 모오로스에게 경인철도부설권을 허가하다.
1898년 (대한제국 광무 2년), 1월 미국인과의 공동 경영인 한성전기회사에 전차, 전기, 전화의 설치 출원을 인가하다.
이상의 기록을 미루어 보면 조선 왕조는 미국에 상당히 우호적으로 대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훈련도 맡기고, 일본과의 교섭에도 미국인에 의존한 것으로 보면 대단히 파격적인 양상이다. 물론 여기에는 청나라의 알선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튼 서구 강대국들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진 것에 비해 미국에 대해서만은 그런 의심을 별로 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은 1800년 초반에는 영국세력을 몰아내는 데 급급하였고, 이어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자체내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이어서 먼로 독트린을 통해 서구 세력에 대해 아메리카에는 더 이상 손을 대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고, 이는 막강한 영국의 해군력에 의해 보장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을 통해 국가체제의 확립, 그리고 서부 개척을 통해 신대륙에서의 영토확장에 열을 올리던 시기에는 해외에 자원을 사용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시기에 고종은 미국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스페인 전쟁을 기점으로 신대륙에서의 스페인 세력의 격퇴(쿠바 등)와 동시에 태평으로의 진출을 감행한다. 바로 1897년의 시점이다. 돌변한 미국은 1897년에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어서 필리핀 원주민의 독립운동을 배반하면서까지 1898년에는 필리핀을 미국의 영토로 만든다. 이제 본격적으로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 지역의 공략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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