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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9세기 2009. 4. 4. 17:05
1840년 중국의 아편 수입금지에 맞서 영국은 인도에서 제배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판을 두른 함대를 파견한다. 이 함대는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 북경으로 가는 세금물품을 실은 배를 공격하여, 그 항로를 차단함으로써 북경에 있는 중국정부의 항복을 받아낸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아편을 어느정도는 복용하고있었고, 특히 필리핀을 장악한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직접 담배를 가져와, 여기에 아편을 피는 방법이 개발되자 아편 흡연이 급격히 증가하였다고한다. 이에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신대륙이 아닌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서 재배되는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여 부족한 무역수지를 메우려고 하였다. 영국이 갠지스 강 유역을 장악하자, 영국은 홍차, 비단, 중국도자기 등을 수입하기 위하여 아편을 수출한다. 중국에 영국이나 인도에서 생산한 면과 모직물을 팔려는 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임칙수는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국왕에서 당시에 영국에서도 인체과 정신적으로 해로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는 것을 비난하고, 이를 영국 국왕이 직접 금해줄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여기에서는 영국에서 아편을 법률적으로 금하고 있다고 지적하나, 서양의 서적에서는 대개 영국에서 당시에 법률적으로 금하지 않았다고 정정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국에서는 당시에 로드넘이라는 아편과 알콜을 섞은 물질을 음용하는 것으로 아편중독자가 생기고 이를 의사들이 정부에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국정부는 그 폐해는 알고있었지만, 유통과 무역을 담당하는 세력들의 로비에 의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결국 영국에서는 1860년경에 공식적으로 금지한다. 그러나 1860년경은 실은 중국에 대해서 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전역에 걸쳐서 아편무역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던 때이다. 따라서 영국은 자국에서는 아편을 금지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아편을 공식 무역으로 허용하라고 무력으로 강제한 국가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아편은 적은 량은 의료용으로사용되고, 19세기 초반에 풍미한 낭만주의 문학가들에게는 상상력과 감수성, 그리고 형상화 능력을 신장시키는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편중독이 되면, 신체가 서서히 마모되어 죽어간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의 남부에서 심하게 추정하는 사람들은 2천만명 이상이 아편중독자였다고 한다. 영국과 서구열강들은 1906년이 되면 중국에 아편을 금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으로 강대국이란 힘이 있는 나라이다.
역사/19세기 2009. 4. 4. 13:10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위중에 독특한 것이 침을 자주 뱉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래침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또한 보도에 따르면 최근에 우리나라 사람들중에 결핵에 걸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연간 6만여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가래침을 뱉는 습관과 결핵과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침을 뱉는 것을 삼가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침을 뱉는 것은 서양에서는 결핵균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히 금지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래서 타구도 만들어 놓기도 하고, 손수건을 사용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아무튼 침을 뱉는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지난해에도 북경 올림픽 때 중국 당국이 거리에 침뱉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였고, 싱가폴에서는 벌금을 내야 한다. 우리의 경우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길거리에 침뱉은 흔적을 자주 볼 수 있다.
침을 뱉는 것은 사회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분 나쁜일이 있을때 침을 뱉는다. 그것도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뱉는 것이 가장 의미가 강한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침을 뱉을만한 사회적 의사표현을 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결핵이 많이 퍼지는 사회적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물론 19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결핵이 많이 퍼진 것은 산업화 과정에서 생긴 먼지때문일 것이다. 공장의 연기뿐만이 아니라, 각종 건설공사에서 생기는 먼지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순수히 인간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인적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공장과 국가의 필요성때문이다. 자본가들은 폐결핵에 걸린 노동자들이 동료 노동자들에게 전염을 시키고 노동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2세 노동자들을 제대로 생산해 내지 못할 것을 겁내하였다. 국가는 특히 전쟁시기에 군인들사이의 전염을 겁내하였고, 그래서 마산에도 1941년에 일본 상이군인들을 위한 결핵요양소가 생긴 것이다. 마산에도 또한 현재 마산대학교의 전신인 마산간호전문대학이 현재 마산의료원 터에 1956년에 개교하여 주로 간호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기능한다.
마산은 1910년에 진주에 생긴 국립병원 자혜원에서 만든 병원을 1914년에 세웠다. 이것이 현재 마산시청 근처의 마산의료원이다. 이후 유명한 문인들이 마산에 요양차, 대개는 결핵때문에 찾아 머물렀다고 한다. 나도향도 1920년대에 마산에 내려와 요양을 했다고 한다. 이후 아마도 1941년에 현재의 결핵병원 위치에 결핵 전문 병원을 일본상이군인을 위해 지은 것 같다. 아무튼 마산은 우리나라에서는 요양이 필요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바닷가의 공기기 결핵 치료에 좋다는 생각, 그리고 따뜻한 기후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육군병원, 철도병원 등도 이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도 육군 병원은 마산 인근에 위치해 있다.
마산은 온화한 기후, 바닷공기를 기반으로 해서 전통적으로 발달했던 의료 도시로 만드는 것도한 방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 마산이 전국에서 가장 조용한 도시가 되었다고 마산시나 신문에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사가 많이 실렸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가장 잠이 잘오는 도시, 또는 미세먼지가 적은 도시를 선정하여 사람들에게 광고하는 것이 있다. 나는 마산시가 현실을 인정하여 무리하지 말고, 오히려 마산은 조용한 도시, 먼지가 없는 도시, 온화한 기후를 가진 도시, 바닷가 공기가 상쾌한 도시라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도시 발전 전략을 세우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연구와 개발를 하기 좋은 도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역사/19세기 2009. 4. 4. 11:01
지난 3월 26일 참여연대 행사가 끝나고, 창동 훌러건 뒤자리 자리에서 우무석 시인이 김려의 우해이어보를 읽어보기를 권유받았다. 진동에 유배온 학자가 스스로 표현하기에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어물과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김려는 아마도 현재 진동면사무소 부근인 진해현청사 부근에 살고 있으면서, 조그만 배를 타고 며칠씩 나가기도 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바, 그리고 정취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톨해 당시의 사회세계의 범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동은 매우 어로활동이 활발하고, 그래서 거제도에서 젓갈을 싣고 와서 모시와 바뀌어 가고, 고성에서도 와서 젓갈을 팔고 그랬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정도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적극적으로는 동래의 장사들에게 일본 수출용 어물을 팔기도 하고(대개는 껍질이나 말린 것), 인근 함안, 칠원, 영산까지는 직접 어물을 팔러가기도 했다. 서울의 상인들이 오기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팔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세금매길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근의 섬들에서는 어획한 물고기들을 진동으로 가지고 와서 거래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진동에는 많은 외지의 사람이 살기도 하고 거쳐가기도 한다. 우해이어보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떠돌이 중과 주막의 여인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저자 김려와 같은 유배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상당수의 외지인들이 진동에 머물다 떠나고, 이들을 대상으로 주막, 식당, 여인들 장사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동의 당시 사회는 어장에 대한 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어 아무나 바다 어장을 차지할 수는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수 있는 채소같은 것을 채취하여 화폐로 교환하여 다시 이를 갖고 식량을 구입하는 교환이 발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진동의 1803년 시기는 화폐경제가 상당한 정도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려는 서울에 비해서 이곳 사람들의 치장에 대해서 촌스럽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울 사람들 흉내를 내기 위해 여러가지 치장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외부세계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봄 도다리라고 부르는 것을 이곳에서는 가을 도다리로 부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거의 현재의 마산과의 거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진동과 현재의 마산(당시에는 그래도 마산창이 있었고, 어항도 발달되어 있을 테인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는 거래가 있을 법한데도 마산과의 거래에 대한 표현이 전혀 없다는 점은 의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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