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의 경제적 성장과 붕당정치

역사/17-18세기 2009. 2. 12. 14:49
평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1750년경에는 이미 양반이라는 계층의 혈연적 세습이 거의 의미가 사라진 시기였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직업적 지위를 이용하여 화폐경제의 이점을 살려서 재산을 축적해 나갔다.  이들 재산을 기반으로 양반이라는 지위를 사들일 수 있었다.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방안으로는 부지런함으로 인해 농사를 지어서 농토를 확장하는 것, 역관 등과 같이 국제적인 무역 기회를 이용하여 상업활동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는 것, 국내 교역이 늘어감에 따라 교통 수송에 종사하여 자산을 축적하는 법, 국내의 거래에 참가하여 이익을 내는 것,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어 이익을 취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반면에 양반들은 기본적으로 농토 또는 자신들의 직위에 기반하여 백성들을 착취할 수있는 공식적 지위에 오를 경우에만 재산을 증식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공식적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노력, 노비, 의관, 예절 등과 같이 양반이라는 신분을 유지시키기 위해 소모되는 비용이 너무너 컸기 때문에 생산보다는 소비적인 요소가 많았다.  물론 양반은 각종 조세나 부역으로 면제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상민 보다는 적게 국가에 수탈당하지 않는 유리함이 있었으나,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이 양반의 지위를 이미 구축하였으므로, 국가도 양반에 대한 특혜를 없애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경제적 자산가 세력의 등장의 정치적 세력화의 한 양상으로 붕당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붕당은 특정 집단이 공직을 장악하여 이를 이용하여 각종 이권을 챙길 수 있다는 점에거 경제적인 이익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각 붕당간에 다툼이 각 붕당의 경제적인 이익에 기반하여 이루어 졌다는 것은 과도한 주장으로 보여진다.  조선조 초기에 국왕은 개국공신세력과 권력을 공유하여햐 했기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재야 유학 세력을 정치와 관료조직에 투입시켜 개국공신 세력들 견제하려 하였다.  이는 아마도 1500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동인, 서인 등과 같은 세력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각 세력들의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특정한 이념적 정책적 대결을 하기 보다는 상당한 정도, 주자학적 세계관의 범위내에서 개인들의 생활에 관련된 이슈를 가지고 대결을 벌이는 양상이었다.  어찌 보면 종교적인 요소를 갖고 국가 정치를 이념투쟁을 하는 것이다.  현대의 종교가 국가 정치를 장악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 것과 같다.

따라서 흥미롭게도 임진왜란 당시 이이(율곡)은 서인이었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1590년 일본을 다녀온 서인출신의 통신사는 일본의 침입할 가능성이 적다고 보고하였고,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은 실은 유성룡을 등에 업고 출세하였다고 가장한다면 동인 출신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경남 지역의 경우에는 동인출신 (또는 남명학파의 북인)들이 왜병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을 하는 의병을 일으켰다.  즉 이기 이원론에서 기를 강조하는 서인들이 실제로는 전쟁에서는 강력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600년대 이후에도 남인 북인의 대결에서도 역시 국가의 정책보다는 (특히 국방) 왕위계승과 예절 문제가 항상 정치적인 이슈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의 정치는 붕당이라는 것을 통해 국왕의 전제를 견제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국가 정책의 발달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특히 인조반정이후 남인의 득세는 소중화주의로 흘러, 오히려 왜와 청나라의 성장을 애써 무시하기까지 정책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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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세상은 혈연을 강조한다.

역사/17-18세기 2009. 2. 11. 17:18
1600년대 후반부터 조선 사회는 핵가족의 형태보다는 확대가족의 형태를 띠고, 장자상속제도를 확립한다.  당시 국가는 외부의 침입에 대해 무력해지고, 신분보다는 경제력이 더욱 중요해지자, 신분은 경제력에 의해 구입이 가능한 것으로 바뀐다.  전쟁은 인간에게 적나라하게 그들의 직접적인 실력이 가장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백성들은 이제 자신들의 경제력만이 그들의 운명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국가가 하는 말은 허언이고, 국가의 말을 따르다가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게 된다고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천민들과 상민들은 국가가 전쟁때문에 백성들의 인력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상민과 천민들은 국가를 상대로 양반의 지위를 요구한다.  양반들은 국가 위기시에 군역과 세금 납부가 면제되어 있으므로, 실제로 국가는 양반에 의존하는 것이 많지 않다.  국가는 상민와 천민들의 신분 상승을 미끼로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독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양반도 백성들에게 퉁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국가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더구나 1600년대 말과 1700년대 초에는 빈번한 이상 기후로 인해 작황이 좋지 않아, 전염병이 창궐하고, 백성들은 이제 떠돌이 생활을 하며, 국가의 통치 범위를 이탈하게 된다.  국가는 좁아진 과세대상를 보전하기 위해 양반을 파는 것을 장려하는 수 밖에 없게된다.  국가 재정은 사실상, 양반신분을 파는 것과 무역과 상업 독점, 부역을 통해서 해결하는 수 밖에 없게 된다.

양반들은 이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양반들끼리의 통혼, 가족 범위를 넓힘으로써 사회적인 불안에 대응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대가족 제도와 장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열연을 통한 재산 보존이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다.  물론 이때에도 집안의 노비가 많아지기도 하고, 그러나 천민의 신분은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즉 신분이 아니라, 경제적인 예속관계로서 종속적인 신분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상당한 정도의 화폐관계나 상업적인 이해관계가 경제관계의 주류로서 자리잡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때 호적도 발전되고, 양반의 지위로 부르는 명칭도 대부분의 백성들이 사용하게 된다.  즉 19세기 초반에 이르르면 전국민의 70% 이상이 양반신분을 획득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호적도 대부분 이때 작성되게 된다.  진성 양반들은 양반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 노력하게 되나, 이 역시 더욱 많은 비용이 들고, 상당수의 양반들은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조달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 신분에서 사실상 탈락하게 된다.  이들은 서당에서 한문선생으로, 아니면 공부를 더해서 한약을 팔 거나, 아니면 의원으로 전업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지방의 공무원 출신들이나 해외에 나들이 할 수 있는 신분에 있는 사람들,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고, 양반신분으로 상승하면서 사회적인 주도 세력으로 움트는 현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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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제와 도덕경제를 뚫고 나오는 상품경제의 싹들

역사/17-18세기 2009. 2. 10. 16:19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 국가 조공체계나 도덕경제를 벗어나서, 유랑하는 백성들이 나타나고, 이들은 국가의 조공이나 공동체를 벗어나고, 그렇다고 자연경제에서도 살지 못하는 유랑민화한 집단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1600년대 말에서 170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자연이상의 빈번함, 그래서 나타나는 식량의 부족, 인구의 증가에 따른 토지 압력의 강화, 아무튼 살기 힘들어진 생활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응으로 토지생산력을 높이고, 경작지를 넓히고, 새로운 구황작물을 도입하여는 시도도 있었고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민화를 떨쳐낼 정도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농경지의 광작화, 집약적 농업의 발달에 따른 노동력의 집약적 필요성, 신분체제의 와해, 국가의 감시체제와 약화, 지방 탐관오리들의 횡포 등이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1700녀대 후반 들어서면 아주 자연스럽게 임노동자군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 시초는 16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임노동자군은 또한 화폐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즉 정부에 내는 세금, 그리고 군역과 부역을 대신하는 사람을 사서 쓸수 있는 제도, 또는 포나 쌀로서 내는 방식의 등장, 정부의 일에 대해서도 일용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키는 방식의 등장은 임금 노동자의 등장을 염두에 둔 정책이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도시 지역, 특히 서울 지역은 이미 1700년대를 넘어서면 약 20만의 인구가 밀집되어 살고 있었으므로, 상당수는 임금 노동으로 그 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촌의 경우에도 전문적으로 임금노동만으로 생계를 영위한 사람들이 발생할 정도로 임금노동의 수요는 상당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점은 임금노동의 존재가, 아니 무산자층의 존재가 곧바로 자본주의의 발전의 단초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임금 노동은 화폐 소득을 매개로 하여 생활필수품을 시장에서 구매아여야 하므로 자연히 시장에서의 상품 교환이 많아질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전국적으로 5일장이 서고, 행상들이 많아지고, 고정적인 상점들도 들어섬으로써 상품 경제는 어느정도 발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내적인 수요 정도로는 대량생산이나, 표준화된 상품을 생산하여 대량으로 판매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분명히 보부상과 같은 아니면 보다 국제적인 무역을 행하는 상인들이 존재하였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이 시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품생산에 직접 나선 것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미약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초기 단계의 화폐, 이에 따른 국제 국내적인 시장의 형성, 화폐의 원재료를 생산해내기 위한 광산의 개발, 국가와 양반수요를 위한 전문적인 생산체제의 구축은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보이나, 일반 소비자들을 위한 상품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 진것은 아직 부족했다고 보여진다.  즉 의복생산의 단계로 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대개는 의복생산은 자족적으로 이루어 진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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