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에 조선은 무엇을 하였나?

역사/17-18세기 2009. 2. 4. 15:15

일본 토요토미에 의한 임진 침략, 후금과 청나라에 의한 정묘호란 등의 두차례의 조선반도 침략은 조선을 일거에 약소국으로 전락시키고, 아니면 약속국임을 스스로 증명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후 조선은 그 멸망의 시기까지 당시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고 서구 열강과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버퉁거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청나라, 일본, 그리고 조선이 각기 다른 길로 가게된 요인은 무엇일까

일본은 이미 1500년대 포르투갈로 부터 조총을 받아들이고, 전쟁의 소요돌이에서 전쟁무기와 실용주의적 경제관, 근검절약하는 습성, 인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능력 들을 발전시켰다.  이어서 토구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네덜란드에게만 무역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은광산을 개발하여 서구와 무역을 전개하고, 내적으로 외부에서 볼 때에는 온 나라가 하나의 군사 요새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인민들의 법질서에 대한 복종의식이 강하고, 국가통치기구들이 상당한 정도 규율된 형태로 움직인다.  조선의 통신사가 오오사카에서 다음으로 이동할 장소로 물건을 보내놓고, 그것이 전혀 손상됨이 없이 도착한 것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필자도 일본에서 두차례 지하철에서 물건을 놓고 내린일이 있는데 빠른 시간에 찾아서 갖다주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란 일이 있다.  물론 군사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 조선의 통신사들에게 제공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전문화된 군인의 수가 8만명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시의 활력, 규모, 상업의 발달, 인민들의 이동 등이 상당한 정도로 발달하였다고 한다.

후금에서 청나라를 세운 이후에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서 적어도 17세기까지는 영토를 넘히는 작업에 몰두하고 실제로 현재의 중국의 국경선을 획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중국은 러시아와 부딪쳤고, 이에 러시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북부, 그리고 시베리아, 연해주 부근에서도 협상을 벌이고 자신의 영토를 확정하게 된다.  조선은 안탑깝게도, 영토 확정의 노력에는 나서지 못한 것으로 봉니다.  다만 청나라와 백두산 정계비를 통하여 영토획정에 나섰으나, 이 역시 현재까지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혹자는 백두산정계비에 나타난 해석을 통해 요하, 할얼빈, 아무르 강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를 획정하는 것이 옳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으나, 아무튼 국경선에 대한 관심이 추세를 따라기 못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의 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그리고 약 1만여명에 달하는 표류자들이 일본을 방문하였고, 또는 무역을 위해 대마도에 나간 상인들을 통해 일본의 현황을 보기는 하였지만, 소중화의식이나 문화적 우월의식을  표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소수가 일본의 문물의 발전에 놀라기는 하였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지만, 대부분은 시급하게 위협적이라고 보지는 않아서 심각하게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의 발전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부의 능력배양에 미친 영향은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 역시 17세기에는 자신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고, 조선은 아직 소중화의식(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충성, 또는 주자학주의자들의 우세)이 남아 있었고 내부 파벌 싸움이 외부환경 판단을 흐리게 하였고,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싹튼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내외를 비교하는 의식이 싹튼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에 비해서 늦었고, 서구는 이미 조선반도 주변을 프랑스와 네덜란드 배들이 넘나들면서 호시 탐탐노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중국의 상인들, 해적들이 조선반도를 넘나들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반응은 아무리 영정조의 시기를 높이 평가한다고 하여도, 기껏해야 1700년이 넘어서야 군사력이 임진란 이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너무도 늦었다, 느렸다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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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확대와 공유는 세계관의 혁명을 가졌왔다.

역사/17-18세기 2009. 1. 30. 12:50
유럽이 아라비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외부세계를 찾아나서게 되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험과 정보는 이들의 세계관을 바꾸었다.  유럽 대륙에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중세의 종교는 더 이상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한 이들에게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틀이 되지 못하였다.  즉 가톨릭, 아니 가톨릭을 정화시키거나, 시대의 변화에 적합하게 변형시킨 개인 중심의 종교들은 신대륙, 아시아 대륙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흡수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새로운 경험 그 자체가 곧바로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고민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항해를 통해 직접 동양과 교류를 하기 전에도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이나 인도와 교류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우연하게 한 경험이었고, 많은 살마들이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항해술이 발달하고, 해외 물자가 들어오고, 해외의 사람들, 동물과 식물, 새로운 기호식품들, 그림과 음악 들이 들어오자 유럽인들은 기존의 종교적인 세계관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더 나아가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달은 우주로 인간의 육체내부의 작은 것 까지 볼 수 있는 길을 터 놓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할 수 있게 됨으로써 기존의 종교적 지식체계가 주장하던 신의 영역이 인간의 가시적인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고, 신의 주장을 검증할 수있게 된 것이다. 과거의 신이 주장하던 우주와 지구의 피조물에 대한 이론, 지리적으로 나누던 천상과 지상의 개념들, 하느님이 창조한 우주에 대한 개념들이 모두 검증받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상당수의 지식은 이제 상호간에 공유될 수 있는 기술적, 제도적, 정치적, 사회적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기술적으로는 인쇄술의 발달이 곧 지식의 보급을 가져오게 하고, 제도적으로는 대학의 발달, 각종 연구자들의 조직, 카페와 공적인 식당의 등장, 그리고 상당수의 군주들은 과거의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과학에 근거한 세계관을 장려하게 된다.

보편적인 세계관을 향한 유럽인들의 노력은 결국, 라틴어를 넘어서는 각 나라의 언어의 표준화 작업, 수학적 언어를 통한 보편적인 의사소통매체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시도, 종교적인 세계관을 대체하기 위한 보편적 철학의 발달을 가져오게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신의 영역에서 연역적으로 사고하기보다는 경험에 근거하여 귀납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고, 장거리 상업의 발달은 소식을 전하고 광고하는 신문의 발달,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보고하고 공유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인 잡지의 등장, 보험과 은행과, 증권거래소의 등장을 가져오게 한다.  장거리 상업혁명은 현대에 사용하는 거의 모든 관행과 제도의 기본적인 만들어 내었다고 보면된다.  말하자면 새로운(근대적인) 인간의 등장이다.  일하는 노역과 눈 앞의 현실을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고, 예측할 수있는 자가 필요한 사회가 등장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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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역사/17-18세기 2009. 1. 29. 13:24

지난 구정 설명절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하는 1620년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타고 간 Mayflower호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지방에 청교도들(영국 국교회를 반대하는 종교도)이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때 설명중에 하나는 당시 북미대륙에는 인디언이 5천만이 살고 있었고, 유럽인들은 2천명정도가 정착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501년인가에 최초로 아프리카의 서부해안가에서 브라질 지역으로 흑인 노예가 팔려가기 시작했다고 전하기는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가의 흑인들이 미국 신대륙으로 본격적으로 판매되지는 않던 시기였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왜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팔려갔을까?

아메리카 신대륙은 미지의 땅이었고, 이곳에서는 광활한 토지에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고국에서 채무노예의 상태로서 밀려서 떠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유럽의 고국을 떠나 앞서 본 종교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곧 미지의 대륙에서 농장 주인이 되고, 이들 농장 주인들은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인디언들을 노예로 사용하여 브라질 부근에서 금광을 개발하고, 이어서 은광, 그리고 캐리비안 연안과 부미 대륙에서는 사탕수수,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이에 열대 기후에 강하고, 질병을 잘 견디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기 시작한다.  1700년대에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현재 추정치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1명의 노예가 오기 위해서는 현지에서는 3명정도의 인명 희생이 따랐다고 한다.  즉 노예를 잡는 전쟁, 내륙에서 잡은 노예를 항구까지 행진시키고, 항구에 보관하고, 배를 태워 보내고,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노예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3명의 희생 후에 1명의 노예가 팔릴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 사학자들이 계산하는 1천2백만(과거에는 1천 5백만명이라고 추정하였다)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위해서 약 4천 8배만명의 아프리카 인들이 잡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생산인구의 감소, 전쟁 능력의 약화가 이루어져서 결국은 유럽의 국가들에게 식민지화되고 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아프리카 내부의 균열, 상호 전투를 부추키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현재의 아프리카는 결국 유럽의 식민제국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노예를 많이 잡은 부족, 노예로 많이 잡힌 부족들은 지금도 여전히 상호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볼수 있다(유럽 중부 콩고, 앙골라, 나이지리아, 니제르 등 아프리카 서부 중부 연안국가들).

노예들의 활용은 산업혁명전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점차 과거보다 많은 노동을 하고, 휴식시간을 짧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산업혁명 전단계에서 지구상의 노동자들은 더욱 많은 착취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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