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독점 능력이 국가 능력이었다.

역사/17-18세기 2009. 2. 9. 17:11
서양사에서 식민지라는 것은 사실상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서구가 그 외의 나라에 대해서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국가체제에 통합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전에는 물론 국가도 하나의 주체로서 참여하였지만, 동인도 회사 또는 서인도 회사라는 형태로 식민지에 가서 무역을 독점하는 형태였다.  물론 이 회사는 무력까지 사용하고, 무역지의 인민까지 지배하는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튼 본국정부가 식민지를 직접 지배하는 형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무역형태를 보면, 일본의 공세적인 조선무역(아마도 청나라와의  중계무역을 통하기도 했을 것이다)과 네델란드와 독점적인 무역을 통해 조선과 중국과의 무역이익을 취하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  물론 네델란드의 입장에서도 일본과의 무역을 상호간의 독점적 성격에 의해 막대한 차익을 낼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영국와 네델란드가 조선과의 무역을 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저지하고 자신들을 통하여 서구의 물품이 거래되도록 하여 자신들은 중간이익을 취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은 일본을 통하여 네델란드가 필요로하는 물품을 수출하였고, 일본은 다시 이를 네델란드에 되팔았던 것이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은을 직접 생산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은을 유입시켜 쉽게 교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조선와 왜 간의 교역 결제수단인 은을 생산하지 못했으므로, 왜의 은을 통해서 청과 왜의 무역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은 이미 은을 통해 국제 무역의 결제를 행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청나라와는 공식적인 사행과 변경무역을 통해, 그리고 밀무역(황해를 건너는 바다와 만주 국경선지역)을 통해 막대한 양의 물품 교류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는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족들의 유목민적 성격에 의해 무역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기도 하였지만, 청나라가 서구와의 무역을 엄금함에 따라, 국내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무역을 허용되었으므로, 매우 활발하였던 것이다.  특히 황해 연안은 중국 대륙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무역로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손쉽게 청나라의 무역선들 (특히 강남의 무역선)이 조선반도의 잔라도 연안에 많이 출몰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래무역에 대한 불안감이 이미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으로 발생하여 가능하면 무역 역시, 국가의 통제하에 그것도 줄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무역상인들만이 독점적인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구조, 그리고 무역에 필요한 물품의 국내 교환이 손쉽지 않았으므로, 상대적으로 전시기에 비해서는 시장거래되는 상품이 늘어다고 하여도 역시, 절대량에 있어서는 대규모 무역을 수행하기에는 적합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는 사이에 조선은 국제적인 무역 네트워크에서 소외되었고, 상대적으로 원격지 무역에 의해 발달이 가능한 국내 생산체제의 활성화도 더디게 진행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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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 후금 -> 청 나라로 가는 동안 조선은 무엇을 하였는가?

역사/17-18세기 2009. 2. 8. 16:27
조선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북에는 만주대륙에 면한 나라들, 서해를 건너 중화대륙에 움트고 있는 세력들, 물론 중국대륙은 남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으로 만주를 통해 육지로 연결되어 있고, 황해를 통해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는 동쪽에 일본이 면해 있다.  물론 남에는 유구열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1500년대 후반과 1600년대 초반은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도 각나라의 세력을 겨루는 시기였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여 국가체제를 완성하고 대외적인 팽창을 통해 내부의 무장세력들의 탈출구를 마련하는 시기였다.  만주 대륙에서는 과거의 몽골 세력 일부가 만주의 여진을 압박하여 조선과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들은 명나라와의 무역을 위해 각 부족세력들간의 다툼과 경쟁, 그리고 이를 통한 실력배양에 나서게 되어 결국은 후금으로 통일된 세력이 나타나게 된다.

조선은 항상 세력균형과 동시에 명나라에의 사대를 통해 자신의 생존을 보존하려는 대외정책을 취하고있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침입으로 드러난 군사군능력과 국가 통치능력의 약화는 결국 1600년대 초반에 이르르면 실질적인 군사력의 약화를 추래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외정보수집과 이를 기반으로 한 대외정책의 수립과 이를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즉 외부의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없었던 틸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를 우리는 국가능력의 부족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본다면 전적으로 왕조 보존과 당시 정치 엘리트들의 능력 부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미 선조때 부터 나타난 왕위계승의 정통성 확보가 부족한 상황은 끊임없이 왕위계승을 둘러싼 무장세력들간의 다툼으로 번지고, 이를 빌미 삼아, 소위 주자학에 기반한 각종 예의 논쟁을 통한 정쟁은 정상적인 정보판단을 흐리게 할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왕조위엄을 살리기 위한 지나친 낭비, 인조반정을 통해 나타난 무장세력에 의존한 왕위 계승의 결과 국가 병력의 기강약화, 광해군이 보낸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에 투항하면서 조선의 최정예부대가 모두 후금의 군사가 되어 버리고 나아가, 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할 때 투항한 조선군이 조선침입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점을 보면 당시 조선의 불행이라기보다는 정쟁을 일삼는 정치엘리트들, 왕의 정치적 능력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후금의 3만군대가 개성에 이르도록 오직 정쟁만을 일삼고, 군사적인 판단을 유보시키고 있는 상황은 현재 우리가 되돌아 보아도 정상적인 통치행위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다.

더구나 후금과 청은 수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전투를 회피하기 위한 타협책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고 전투력은 준비되지 않은 척화책은 결국 항복이라는 치욕적인 행태를 드러내게 된다.  말만 앞세운 의리, 백성들은 안중에 두지 않는 정책, 오로지 자신들의 정치적인 세력의 보존과 확대만 염두에 두는 정치인들은 바로 아무리 제대로 정보를 갖고 있고, 대외적인 타협책의 여러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치욕, 그리고 국가의 약화, 백성들의 고생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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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달러의 운명

시사 2009. 2. 7. 14:03
어제 비판사회학회 동계 워크샵이 이화여대에서 열렸다.
유철규 교수와 정태인 경제평론가가 금융위기와 한국경제에 대해 그들의 견해를 발표하고 질의응답으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주제가 최신의 것이라 모두 조심스러워 하였다.  이미 미국의 경제학에서도 기존의 경제학 대신에 정체경제학적인 요소의 강조(이익집단이 경제현상을 좌우하는 문제), 자산경제(금융경제)와 실물경제의 작동원리의 괴리에 대한 이론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점에서 경제학의 위기로 규정하고 있다. 
유철규 교수의 견해에서 특이하게 들은 점은 (1) 추가 위기의 가능성: 모기지 론의 위기에서 회사채 시장의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 이는 추가 상업은행들의 위기로 이어지므로, 현재 미국정부는 이 경로를 차단하는 데 최우선의 정책를 사용하고 있다.
(2) 미국의 달러가 기축달러의 지위를 잃을 가능성: 유로나 엔, 위안화가 지역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은 높으나, 미국의 달러를 대치할 수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다.  이 때 능력이라 함은 국가가 자국 화폐의 적자를 감당할 수 있는 환류 메카니즘을 갖고 있어야 한다(해외로 나간 돈이 다시 국내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능력).  현재 중국은 미국이 요구하는 달러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미국 채권을 매입하는 형태로 가겠지만, 이에 대한 댓가로 상해에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를 만드는 것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협조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3) 2008년도의 국제 수지는 모든 면에서 적자를 기록하였지만, 가장 큰 몫은 은행들이 돈을 빌리지 못하고, 기존의 부채를 상환하여야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은행의 단기 부채 규제가 외환관리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4) 현재 우리나라 경제는 오로지 공공및 민간의 토목공사 발주에 의존하고있다.
(5) 한국의 과도한 해외의존형 성장 전략은 이미 2006년에 시작되었으며, 이는 현재 미국의 직접적 영향뿐만 아니라, 중국을 통한 미국의존이 동시에 나타나므로 중국수출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6) 우리나라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장외파생상품의 거래의 도입이 늦었기에 미국발 파생상품의 위기 영향파급이 약화되었다.  앞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 이점에 유의하여 금융시장 개방은 점진적으로 이루는 것이 옳다.
(7) 이미 기업들이나 투자주체들이 실물투자에서 금융투자로 많이 비중을 옮기고 있는 추세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현금성 자산을 많이 보유하면서 이를 금융투자 하고 있는 형편이다.  즉 일자리가 금융과 실물 투자의 분리 현상, 일자리 증가가 둔화된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투자유발효과가 적은 금융투자에 집중되고 있는 현상과 관련있다.  또한 소비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실물투자를 기피하는 있다.
(8) 국민 연기금은 물론이고,일반 가계들도 금융 투자에 참여하고 있어서 금융투자의 영향을 매우 커지고 있으며, 기업의 부채가 가계의 부채로 전이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태인 경제 평론가의 견해중에 흥미있는 내용은
(1) 미국은 이제 국제적인 협의를 통해 자신이 치루어야 하는 비용을 전가하려 시도할 것이다.  중국에게 전가하여야 하는 데 이는 쉽지 않으므로, 만만한 한국 같은 곳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시범적으로 비용 전가의 압력을 가할 것으로 생각한다(우선 자동차 분야).
(2) 한중일 경제 협력의 가능성: 중국의 패권주의적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한중일 협력하여 독자적인 지역통화를 반들어 내야하는 과제는 있지만, 기본원칙 정도에서 움직일 것이다.

다 같이 생각해야 할 내용인 것 같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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