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두려워 한 조선전기

역사 2009. 1. 16. 16:12

조선의 탄생은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건설된 상황에서
이미 여진족, 왜구, 홍건족의 침입으로 약화된 고려왕조 대신에 국가 재건의 차원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한반도의 경우에 좁은 국토라서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무너질 왕조가 너무 오래 버티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아마도 지방이나, 상업의 약화가 일차적인 이유일 것이다.  결국 조선 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조선 역사상 가장 문화나 재정이 튼튼한 국가체제를 갖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은 이웃나라나 서구의 역사에 빗대어 보거나, 원나라 지배이전의 고려시기의 해양상업의 발달에 비추어 본다면 퇴보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성계가 고려 왕의 명령을 어기도 모처럼 만에 찾아온 중국 대륙과의 호쾌한 전투를 마다하여 유약한 이성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출신성분이나 그의 경력을 보면 한반도의 변경을 오가면서 여진족, 홍건족, 왜구를 물리치면서 지역을 누빈 인물이라는 점에서 유약한 그릇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다만 명나라를 섬기고,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의 기틀을 삼음으로써, 국민들의 개방적인 기상이 취약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명나라만 하여도 남송을 이어받은 명나라는 초기에는 해양상업에 대해 금지하지 않고 허용함으로써 동아시아(남중국해) 해상 무역권을 발달시켰다.  물론 우리나라도 소극적으로 이 때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무역을 한 흔적이 있고, 심지어는 태조때에는 태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도 있다.  물론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들 나라가 먼저 우리에게 무역을 청해와서 한 소극적인 무역이었다.

그러라 조선은 왜구의 침입에 대한 공포, 삼별초 난에 대한 해상 세력에 대한 공포감이 강하여 해상무역을 발전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세종때 대마도를 정벌하면서도 왜구가 한반도를 공격할 것에 우려를 심히 하였다.  물론 조선조에 들어서면 상대적으로 고려말에 비해서는 왜구의 공격에 대해 방어를 잘하는 편이지만, 왜구는 이때(설사 일본의 공식적인 나라와는 구분한다고 하여도) 중국의 해상도시는 물론이거니와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중국도 1300년대후반과 1400년대 초반을 통해 동남아의 말라카, 인도의 갤리컷에 진출하였다.  조선만 여기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조선전기의 역사에서 서구의 르네상스, 지구상의 발견, 상업의 부흥 등의 근대의 기틀을 마련하는 동안에 고려때까지만 해도 왕성했던 무역과 제국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본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세종조의 시기에 나타났던 문예부흥, 국가 기틀의 마련이라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세계사적인 의미에서는 너무 좁은 평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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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개방이 발전을 가져온다

역사 2009. 1. 15. 11:21

가톨릭이 지배했던 중세를 지내고, 1400년대에 들어서면 비잔틴(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지식인들이 이태리로 망명)과 이슬람 권의 지식과 문화가 유럽에 유입된다.  이 과정에서는 많은 과학적 지식들이 수용되고, 창작되고, 확산된다.  물론 이러한 지식의 수용과 확산에 반발하여 종교재판, 화형식, 마녀사냥, 이단서적 금지 등의 방식으로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 또한 강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가 앞섰다고 주장하는 금속활자보다 우수하지는 않아도 1457년에 구텐베르그는 이를 이용하여 시편을 발간하고, 이후 약 50년간에 걸쳐 유럽에서는 매년 약 2만여권의 책들이 보급되게 된다.  당시의 책은 대개 수도원에 갖혀있는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구텐베르그로 인해 비로서 지식이 일반 대중에게 쉽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라무스는 1543년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는 책을 발간한 후에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당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라무스가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당시에는 구텐베르그의 인쇄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과학적 지식을 감추어서 사용하는 것 보다는 공개적으로 출판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문화적 인정방식의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역사적 기록에는 1562년경부터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이루어 진 것으로 나타난다.  마녀사냥이란 사회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회나 자연 현상이 발생했을 경우에, 이를 도저히 설명할 방식이 없으므로 이웃의 한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희생양에게 모든 잘못된 현상의 원인으로 돌리고, 이를 불에 타 죽임으로써 스스로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방식을 말한다.  따라서 미신과 사회적 배쳑에 기반한 현상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브루노는 모든 것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592년 5월 23일에 베니스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구속된다.  결국 1600년에 우주의 무한성을 말했던 브루노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한다.  또한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유럽 사회는 종교적으로도 1400년대에 체코에서 시작되면서 종교 개혁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유럽에서의 가톨릭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국가체제이면서, 동시에 법률을 가지고 있고, 교회가 다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헌금을 받아서 사용하는 막강한 경제적 부를 동시에 노리고 있었다.  따라서 주교는 하나의 정치적인 인물로서 귀족계급에서 선출되었고, 신부들은 다만 하나의 고용인이었다.  1500년대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위그노와 가톨릭의 대결, 1600년대의 30년 종교전쟁 등은 썩은 종교 가톨릭에 대한 정화운동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계관과 조화시키려는 시도였다.  물론 모든 개신교가 모든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  칼빈교는 특히 스위스에서 기독교 광신적인 독재정치를 펼쳤고, 영국에서도 1600년대에 청교도 혁명은 모든 시민들에게 청교도 윤리를 강요하였다.  따라서 한편으로 가톨릭과 비슷하게 개신교도 자신의 종교만이 최고의 종교이므로 누구나 믿어야 한다는 강한 독선에 빠진 점은 비슷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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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약소국이 살길이다.

역사 2009. 1. 14. 18:38
서양에서는 중세가 마감되는 1350년경부터 날씨는 차가와지기 시작하지만
르네상스라는 문화가 부흥하는 계기를 만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 문화권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서 망명해온 인적 자원과 문화적 영향을 보강하고
몽골 제국의 탄생으로 용이하게 된 동방무역을 통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임으므로서 유럽이 세계 역사를 지배할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영향력 약화, 이슬람이 강대해졌다가 다시 약화되는 시기, 유럽의 민족국가가 거의 완성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나는 가끔 우리는 이 시기에 무엇을 했던가하는 자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원나라는 물려났고, 그러나 명나라가 들어서서 조선을 지배하려고 한다.  바깥 일본 열도에서는 전국시대가 시작되어 왜구가 날뛰고, 각지의 장군들이 서로 지역을 기반으로 쟁투를 벌이게 된다.  한 일본인이 이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한반도에는 당시에 일본의 지역의 장군들과 같은 사람이 없었느냐고 묻는다.  일본은 1600년경에 되어서야 전국이 통일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등장하지만 이는 곧 명나라에 의존하는 사대적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1400년대는 한반도에서도 문예부흥, 국가의 기반을 정립하는 시기가 된다.  조선조 역사에서 조선 전기가 조선 후기에 비해 국가가 더 강했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1500년말에 벌어진 전국 통일의 시점에서 오오다 지역(지금의 동경을 포함한 관동지역)을 공격하는 풍신수길은 10만 군인을 동원한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할 때에도 역시 15만 군인을 동원하므로,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는 정도가 나온다.

임진왜란 2년전인가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하고, 이들의 국력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사신들은 정파의 이익을 위해 해외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곡해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한반도가 완전히 일본에 먹히는 1910년경에도 한반도에는 2만정도의 병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는가?  조선 전기의 내부 상황은 내부적으로 초기의 개국공신들과 왕권, 그리고 새로운 사림 세력들, 재지 토호 세력들이 상호 각축을 벌이는 양태였다고 보여진다.  이들은 내부적인 정치적인 다툼을 위주로 인민들을 착취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실질적인 경쟁과 다툼 보다는 정치적인 타협와 야합을 통해 인민 착취의 균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이 시기가 융성했던 한 시기라고 평가할 수있을지 몰라도, 세계사에서는 뒤떨어지는 시기가 된 것이다.

일본의 한 영주는 이미 1500년대 초반에 푸르투갈의 무역을 받아들였고, 일본의 왜구들은 중국 해안가에 진출하고 심지어는 동남아까지 진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은 1400년대에 정화 원정대를 아프리카 동쪽까지 보내던 시기이다.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4군 6진을 설치할 동안이다.   바깥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약소국이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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