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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900-1919 2019. 8. 4. 12:34
르이빈이 파벨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파업을 하기는 힘들걸세! 돈 몇푼에 눈이 뻘게지긴해도 겁은 많거든. 삼백명이나 따라오려나? 그 이상은 어려워. 쇠스랑 하나로 퍼 올리기에는 퇴비의 양이 너무 많아. 말은 잘했는데, 마음을 못움직였어. 심장깊숙이에 불을 댕겨야 해"...
시조프 영감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우리같은 늙은이들은 이제 무덤이나 가야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소? 무릎꿇고 벌벌기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리며 살지 않았소?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요. 젊은이들을 보구려. 사장하고 대등하게 말하잖아요. 전혀 거리낌이 없어요.....
르이빈이 중얼 거렸다. "자넨 이제 틈새를 메우는 시멘트와 같네! 파벨, 자넬 대표로 뽑자고 소리치던 사람들을 보았지? 사회주의자니 선동가니 하면ㅅ허 수군대던 사람들 역시 그들이었어! 당장 해고당하기는 싫고, 자네가 길을 열어주면 따라가겠다는 거지". (고리키, 1906/2006, 어머니, 푸른 숲: 82-83 => 원문을 축약한 것).
"You cannot get them to strike!" said Rybin, coming[Pg 90] up to Pavel. "Greedy as these people are for a penny, they are too cowardly. You may, perhaps, induce about three hundred of them to follow you, no more. It's a heap of dung you won't lift with one toss of the pitchfork, I tell you!"
Pavel was silent. In front of him the huge black face of the crowd was rocking wildly, and fixed on him an importunate stare. His heart beat in alarm. It seemed to him as if all the words he had spoken vanished in the crowd without leaving any trace, like scattered drops of rain falling on parched soil. One after the other, workmen approached him praising his speech, but doubting the success of a strike, and complaining how little the people understood their own interests and realized their own strength.
Pavel had a sense of injury and disappointment as to his own power. His head ached; he felt desolate. Hitherto, whenever he pictured the triumph of his truth, he wanted to cry with the delight that seized his heart. But here he had spoken his truth to the people, and behold! when clothed in words it appeared so pale, so powerless, so incapable of affecting anyone. He blamed himself; it seemed to him that he had concealed his dream in a poor, disfiguring garment and no one could, therefore, detect its beauty.
He went home, tired and moody. He was followed by his mother and Sizov, while Rybin walked alongside, buzzing into his ear:
"You speak well, but you don't speak to the heart! That's the trouble! The spark must be thrown into the heart, into its very depths!"
"It's time we lived and were guided by reason," Pavel said in a low voice.
"The boot does not fit the foot; it's too thin and[Pg 91] narrow! The foot won't get in! And if it does, it will wear the boot out mighty quick. That is the trouble."
Sizov, meanwhile, talked to the mother.
"It's time for us old folks to get into our graves. Nilovna! A new people is coming. What sort of a life have we lived? We crawled on our knees, and always crouched on the ground! But here are the new people. They have either come to their senses, or else are blundering worse than we; but they are not like us, anyway. Just look at those youngsters talking to the manager as to their equal! Yes, ma'am! Oh, if only my son Matvey were alive! Good-by, Pavel Vlasov! You stand up for the people all right, brother. God grant you his favor! Perhaps you'll find a way out. God grant it!" And he walked away.
"Yes, you may as well die straight off!" murmured Rybin. "You are no men, now. You are only putty—good to fill cracks with, that's all! Did you see, Pavel, who it was that shouted to make you a delegate? It was those who call you socialist—agitator—yes!—thinking you'd be discharged, and it would serve you right!"
(Gutenberg 프로젝트에서 인용한 영어번역문에서 인용).
교양 2014. 3. 27. 11:09
이번 학기부터 학교에서 교양기초교육원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그 동안 운영되던 교양기초교육부를 처나 단과대 수준으로 승격시키고, 교수학습센터는 독립시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조치이다. 그 동안 경남대에서도 교양 기초과목을 전체 졸업 이수학점 130학점에서 30학점이 될 만큼 수량적 측면에서 증가되어 왔다. 그러나 현금의 기초교육의 내실과 교야에 대한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즉 고등학교에서 이수한 학력으로는 대학의 전공과정에 진입하기 어려운 사정에서 기초교육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학교육에서 교양과 인성이 강조되는 사회적 수요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제 경남대 교양기초교육의 3주 반이 지나면서, 그 동안 현황 파악, 체제 정비에 시간을 바쳤다면, 이제는 조금 큰 틀에서 과연 경남대에서 어떤 교양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을 할 시기가 된 것 같아서, 오늘 아침 서재에 꽂혀있는 서적 중에 헤겔(1770-1831)이 1818년 베를린 대학에서 행한 교수취임 연설문을 접하게 되었다. 우선 드는 의문은 우리나라의 경우에 교수 취임연설문이라는 제도적 관행도 없고, 이런 종류의 취임 연설문이 어느 정도 유용성이 있나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물론 당시에는 프러시아 제국의 대학제도에서는 대개 한 교수가 하나의 강좌를 맡고 있으며, 이는 2개 이상의 강좌를 요청하면, 거절하는 것이 관례인 것 같다. 물론 현재는 독일의 정교수들도 하나를 맡지는 않고, 2-3개의 강좌를 맡는 것이 관례이지만, 적어도 1970년대 대학교육이 대중 교육이 되기 전까지는 교수의 권위가 막강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사회학의 경우에도 막스베버가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논한 것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 강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서양의 학문 제도와 대학제도를 도입해서 운영하고있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고, 경남대 교양을 논하면서, 헤겔로부터 끌어 오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유쾌한 일을 아니지만, 그래도 헤겔을 읽고 보니, 교수 취임 당시에 프러시아제국이 초한 사회적 현실에서 철학이 행해야 할 일을 제시한 점에서 그냥 철학 일반을 설파한 것이 아닌,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대해 철학이 행해야 할 소명을 말하고 있어서 그것이 마치 경남, 아니 대한민국, 지구적 시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경남대 교양에서 제시해야할 목표가 있는 것으로 보여 느낀 소감을 말해 보고자 한다 (G.W.F. Hegel, 1818/2004, [교수취임 연설문], 책세상).
헤겔은 당시에 독일이 처한 상황을 반철학적 사조가 팽배한 시기로 규정한다. 물론 당시 독일은 프랑스 나폴레온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절치부심하던 상황이었다. 헤겔이 스스로 자부하듯이 독일은 사상적, 사유적, 철학의 본류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점을 간과하지는 말지만, 그렇다고 헤겔의 철학적 사유 자체를 독일 국수주의의 표현이라고 폄하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는 당시의 시대 상황(23쪽)을 (1) 정신의 궁핍함과 일상의 관심사에 몰입하는 것, (2) 사건들의 공허한 자만 Eitelkeit (영어로 vanity)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신의 궁핍함에서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단순히 이성이라고 하면 규정이 어려워 진다. 사유적 이성을 조금 더 진전된 형태이다. 즉 즉자적 이성이 아닌 보다 심오한 사고의 과정과 단계를 더 나아간 이성이라는 뜻으로 일단 해석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성적인 사유이자, 감성적이고 사념적이며 주관적인 것이 섞여있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면서 스스로를 전개시켜 나가는 사유입니다” (29쪽). 또는 반성적 사유로 규정하기도 한다. 즉 이성적 사유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반성적 사유라고 지칭한다. “인간 속에 본능적으로 있는 이성적인 면과 이것을 향하는 반성적 사유가 인간을 이 현상 세계에서 보편자와 근원자로 인도하며, 근거와 원인들, 법칙들에 대한 탐구로 인도하며, 이렇게 변화무쌍한 가운데 지속하는 것ㅇ데 대한 탐구로 인도합니다” (31쪽). 즉 정신은 바로 반성적 사유를 통해 이성적 사유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성과 이성적 사유로 나아가게 하는 반성적 사유가 당시에 궁핍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것을 바로 일상에의 몰입에 의해 더욱 조장된다는 것이다. 왜 일상에의 몰입이 이성과 반성적 사유를 방해하는 것일까? 이는 반성을 통해 이성을 작동시켜, 남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보편자, 근원자, 근거와 원인들, 법칙들로 나아가는 사유의 과정을 방해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헤겔은 당시 베를린 대학에 헤겔의 철학 강의 그 중에서도 첫 개설강좌인 자연법학 Wissenschaft des Naturrecht (knowledge of natural law 자연법 학, 실증법학에 대비되는 용어)을 개설하면서, 학생들에게 당부한다. 즉 청년의 정신을 주장한다. 즉 대학에서 수강하는 청년들에게 청년의 정신을 가질 것을 주창한다. 청년이라는 존재는 시기상 “아직까지 궁핍한 제한된 목적의 조직에 얽매이지도 않으면서, 사심없이 학문적인 일에 종사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시기”라고 규정한다(27쪽). 여기서 학문적인 일이란 직업으로 앞으로서 학문에 종사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대학이라는 테두리에서 제공하는 학문의 맛을 들이고 수업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청년은 “자만이라는 부정적인 정신에도 아직 얽매이지 않고, 단지 비판만 하려는 악착같은 노력이 지닌 몰내용성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시기”라고도 규정한다. 따라서 청년들은 “건강한 가슴으로 진리를 열망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고 규정하면서, 청년이야말로 철학하기에, 반성적 사유로 이성적 사유를 하는데 적합한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헤겔은 청년들인 수강생들에게 부탁하기를 “학문에 대한 신뢰와 이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즉 일상적인 궁핍함에서 나와서, 이성적인 사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면서,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이 가진 위대한 힘인 이성적 사유, 반성적 사유에 대한 힘을 믿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진리에 대한 용기와 정신의 위력에 대한 신뢰는 철학 연구의 제일 조건입니다”(27-28쪽). 믿음과 용기를 말하고 있다. 나는 항상 책을 읽는 용기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는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인데, 영어권에서는 어릴 때부터 이런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즉 독서는 용기있는 자만이 할 수 있고, 독서는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므로, 대단한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한다. brave라는 영어 표현이 육체적인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는 점을 전재한다면, 용기를 갖고 독서를 하자는 표현은 육체적 고통을 통해 사유적 반성과 이성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는 헤겔의 의도가 나타난다고 보인다.
이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반성적 사유를 행하는 것, 세계사의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용기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고, 자신의 사유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만이 행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나의 반성적 사유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을 갖고 나의 이성적 능력을 함양시킨다면, 세계는 다르게 나에게 다가온다. “인간이 세계를 이성적으로 주시할 경우에만, 세계는 인간에게 이성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30쪽). 나도 경남대 교양기초교육원에서 의사소통에 기반한 기초, 전공에 앞선 학문적 기초, 자유시민적 교양, 사회생활에 앞선 도구적 교양 등을 염두에 둔다면, 주위의 교수님들과 학생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요청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는 우리 모두가 대학에서 반성적 사유에 기반한 이성의 힘을 길러 사회에 진출하는 대학의 이념을 주창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역사/20세기 2013. 10. 29. 15:52
지난 금요일 10월 25일 금요일 오후 4-6시에 경남대 인문관 101강의실에서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1993년)을 모시고, 경남대 인문학 명사 강좌를 개최하였다. 중간고사가 있는 주일의 금요일 오후라서, 학생들의 참석이 어려울 것이라고 학생회에서 우려를 전달하였다. 한선생님의 일정을 고려해서 그리했기에 그대로 진행하였다. 그래도 학생들이 사회학과의 경우 현재 85명 재학생에 20여명이 참석하였고, 질문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선생님은 강연중에 역사적인 사실과 평가를 하시면서, 민족 자주의 입장에서 평화적인 상생을 주장하셨기에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우리 교수들을 혼내셔서 그런지 학생들이나 일반 청중들은 교수가 어른 교수님으로부터 꾸중 듣는 모습이 생소해서 흥미로왔다고 강연후에 전해 들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경상대나 경남대에 있는 제자들이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말쓰하시고, 그러나 청중들은 한완상 선생님이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민족과 사회적 실천에 대해 말씀하시는 모습을 감동을 받았다고 역시 나에게 전했다. 이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전달될 모르지만, 사람이 특히 지식인이나,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는 세태에 비추어 보면 감동적인 모습인 것 만은 사실이다.
최근에 나온 저서에 사인을 해주시면서, 날자는 2013년 10월 26일로 기록해 주시고, peace maker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peace maker는 이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2000년에 안기부장)이 저서에서 사용했던 말이다. 즉 임동원은 peace keeper가 아니라 peace maker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한민족의 번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구권이 망한 시기에 북한은 남북 관계의 개선을 간절히 소망하였다. 이유는 중국과 소련이 한국과 국교정상화하는 상황, 그리고 사회주의 권이 개혁 개방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체제 유지와 개혁개방의 물꼬를 트려고 했었던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를 철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내걸고 있던 세력들은 남북한의 화해 협력을 바라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노태우 대통령 말기에 남북 협상이 완료되었고, 비핵화 선언이 나왔던 것이다. 1992년에 조치를 취하려던 이인모 장기수의 북한 송환은 다시 미궁에 빠져 버린 상태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민족을 최우선의 가치로 둔다는 점을 천명하고, 한완상 교수님이 통일원 장관 겸 부총리가 되면서 전격적으로 3월에 이인모씨의 송환이 이루어 졌다. 그 이후 보수언론에 의해 한완상 총리는 좇기는 신세가 되고, 김영삼 대통령도 역시 여론의 악화를 염두에 두고 과감한 정책을 취하지 못했다. 당시에 서울 광화문 정부 종합청사에서 부총리 님을 만난 나는 약속도 없이 찾아간 제자에게 1시간 이상을 할애하시면서, 현재의 상황을 셜명해 주셨고, 바깥에서 도와달라는 말씀을 들었으나,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그냥 방관한 기억을 갖고 있다.
통일원이 대북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고, 안전기획부에 의존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따라서 주도권을 갖고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동원의 책에 지적되었고, 1993년 가을에 감사원 감사를 통해 밝혀진, 안기부의 대통령 청훈 묵살, 왜곡, 지연 등의 문제점이 사실상 안기부는 남북 화해를 대통령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방해하고 있었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을 한완상 전 통일원장관께서는 책을 통해서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로 표현하셨다. 강연 말미에 발악이 아닌 발선을 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면 선이 돌아오고, 선 순환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실은 이것이 신뢰프로세스다. 엄연한 국제관계에서는 다소 낭만적인 표현이지만, 그래도 우리와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강소국의 전략으로는 염두에 두어야 할 전략으로 여겨진다.
역사/20세기 2013. 10. 17. 10:52
어제 부산 민주공원에서 "부마에서 광주로"라는 부마항쟁 34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필자는 토론자로 참석하였다. 부마의 1979년 10월 16-20일 사건 -> 1980년 4-5월의 서울의 봄 -> 1980년 5월 18-27일 광주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선을 가정한 학술대회였다. 역사적 의의와 연관성을 찾는 학술대회였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 영향을 준 사람, 받은 사람, 영향을 주고 받은 매체들, 그리고 내용에 대한 대한 논의가 포괄적으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다. 만일 항쟁의 지도부 내지 조직음모자들의 경우에는 어느정도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증거가 나왔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또는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실제와 이를 표현하는 것이 다른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즉 적어도, 영향을 받았다, 주었다는 것은 금기시 되는 표현이다. 시위의 조직자들이 영향을 주거나 받는 것은 범죄행위로 처벌받는 상황에서 실제로 주고 받은 것을 잘 표현하지 않았고, 가능하면 이러한 일을 스스로 금지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범죄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영호남의 관계라는 것이 어느 쪽이 다른 쪽에 영향을 수수할 수있는 그런 표현문화적 허용을 용납치 않고 있다는 점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정치권이나 지역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권이나 심지어는 학술연구자들도 지역 상황의 영향을 받기에 그렇 실증적 분석이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손쉽게 등장한 것이 서울 우회론이다. 서울 우회론에 대해서는 부산과 광주가 합의하기가 용이한 부분이기에 그렇다. 서울은 지역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시장을 이루어서 누구나 참요하여 경쟁하는 장소이기에 부산이나 광주도 그들의 구성인자들이 서울에서 자라고 논의하는 장이 마련된 곳이어서 서울의 영향을 그곳에 있는 재향 인사들로 받았다면 쉽게 용납할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서울 우회론은 실은 실제의 여부에 관계없이 쉽게 합의 할 수 있는 가설이다.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을 직접적인 의사소통으로 파악한다면, 여러가지 경로를 복합적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1) 인적 교류: 당시에 부산과 마산은 하루에도 거의 10-20분간격으로 시외버스가 다녔고, 따라서 부산의 소식은 쉽게 마산에 전파되었으며, 또한 통학내지 통근권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경남의 여러 공장지역에서는 호남 출신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물론 주로 전남 동부쪽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들의 친인척을 통해 광주의 소식을 쉽게 경남으로 흘러 들어올수 있는 인적 교류의 통로는 있었다는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당시에 정확하게 며칠까지 광주와 연락이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5월 18일, 19일, 20일정도까지는 광주의 교통편과 통신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었으므로, 광주의 소식이 외부로 전해질수 있는 통로는 열려있었다. 언론의 보도도 일단 정부측의 발표이기는 하지만, 인쇄되어 나왔고, 따라서 무엇인가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가톨릭조직이나 기업 조직 등도 정보 소통이 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언론도 초기에 보도팀을 파견한 경우에는 이들이 어느정도 보도를 하고 있었다.
어제 논의에서는 광주와 부산이 다루어졌지만, 대구의 장세룡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님은 두가지 지적을 하셨다. (1) 사실은 1979년 10월 16-20일 부마항쟁이 발생하였을 때 대구에서는 민주화운동 전통이 미약한 지역에서 저렇게 커다란 저항 시위가 발생한 것에 대해 놀랐다고 한다. (2) 1980년 서울의 봄시기에도 대구에서는 영남대 등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전개하였고, 실제로 골목까지 따라들어와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였고, 포항에서 해병대가 온다는 소문도 돌아서 상당히 치열한 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부산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느 점을 지적하였다.
아울로 방청석에서도 두분이 마산과의 연관성을 가지셔서 흥미로왔다. (1) 한분은 윤미숙 (현재 73세로 추정, 1980년 당시 40세로 소개, 부산민주당 고문) 할머님으로 1960년 마산 3.15의거에 참여하신 분이라고 소개하였다. (2) 또 한분은 경남대 78학번이라고만 소개하신 분이다. 따라서 1979년 10월 18일 마산 민주 항쟁에 참여하신 분이라고 소개하였다. 1981년에 군사훈련단에 있었고, 80년이후 상무대에서 보수교육을 받았다고 표현하였다. 정확한 의미는 필자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발언 내용을 소개하기는 어렵다.
시사 2013. 10. 7. 16:12
1988년에 유고의 두브로브닉(현재 크로아티아)로 가는 비행기를 뉴욕에서 탔는데, 이 비행기의 최종 기착지가 로마니아 부쿠레스트였다.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들이 많이 탔었다. 동구분들이 그렇지만, 당시의 나의 눈에는 무천 친근하고, 우리와 사는 정도가 비슷하니,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내기 그때 미국에서 살았으므로, 미국에 비해서는 잘 못사는 나라로 여겼을 것이다. 2000년인가 남아프라카의 더반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 루마니아 사람을 만났는데, 현대조선소에서 일하고, 아마도 흑해인근에 수리조선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에서 어느정도 돈을 벌면, 루마니아의 흑해 연안에서 별장을 짓고, 관광객을위한 여관 같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더만은 현대상선이 선원들의 임무를 교대시키는 곳이라 그런 사람을 만난 것 같다.
지난 주말에 루마니아를 다녀온 분의 말씀이 현재 잘 사는것 같았고, 그래서 더욱 북한 생각이 났다고 말씀하신다. 즉 루마니아는 어찌되었든 현재 과거보다는 시장경제를 도입해서 잘 사는 것으로 보였고, 실은 루마니아는 간혹 북한의 개혁과 비교되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실은 루마니아는 차우세스쿠는 독재였지만, 1968년 소련의 체코 침략이후에 소련에 반기를 든 나라로,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결국 1980년대에는 어느정도의 경제성장도 이어졌지만, 부채문제도 심각하게 되었고, 독재도 강화되었다. 루마니아를 북한과 비교하는 이유는 루마니아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독재가 이루어졌고, 그 기간 동안에 급격한 근대화 정책이 이루어 졌기에 그렇다. 1989년 12월 25일에 차우세스쿠 당시 대통령이 자신의 경호부대원들에 의해 사살당한 후에도 북한의 붕괴를 바라는 사람들은 루마니아식 북한 붕괴에 대해 평가를 하곤하였다. 이후 루마니아는 민주화의 물결보다는 민주적 선거를 통한 독재정치 비슷하게 되어 가고 있다.
최근에는 루마니아가 EU에 가입한 이후에 루마니아인들이 독일이나 EU 회원국들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신문에서 논란이 되는 보도가 뒤따랐다. 루마니아 인들이 많이 이주하는 베르린의 시의회 의원이 루마니아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루마니아를 방문한 기사가 Spigel에 실렸다. 정치지도자들의 고급 의상, 진정성 없게 대하는 태도, 시의원을 자선사업가나 개발업자로 치부하는 태도,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 비꼬는 듯한 어투 등을 나열하고 있다. 루마니아는 1970년대부터 서방의 지원을 받아서 경제발전를 꾀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해외부채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지도자들이나, 지식인들이나 종교인들 조차도 자신의 나라에 자부심,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족하기에 이런 태도가 나왔을 것이다.
지정학적 역관계에서 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은 어쩔수 없지만, 이러한 운명을 가늠하는 것은 그나라의 정치와 문화, 역사라고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비젼을 중심으로 한 나라의 구성원들이 뭉칠 수 있는 정치체제와 지도자를 갖는 것이 루마니아 미래를 위해 우선적으로 긴요한 요소인 것 같다. 현재 루마니아는 과거의 대통령에 대한 인기도없고, 현재 지난해에 선출된 총리는 헌법을 고쳐서 자신에게 모든 권력을 모으려고 하고 있다. 즉 민주적 체제를 뒤엎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위와 아래는 상호 조응하면서 국가의 자부심과 응집력을 좀먹는 것 같다.
역사/BC 2013. 10. 5. 14:15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낭만적 민주주의였다고 평가할 수있다. 아마도 유권자 3만명 정도의 도시 (실제 거주인구는 15-20만명의 정도), 그리고 실제 집회에 참석하는 인구는 6천-8천명 정도였다고 추정하고있다. 대개 약 170년 정도 지속했을 것으로 예측한다. 직접 민주주의는 세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민회 assembly에 참여하여 토론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들을 대표하는 council을 선출하는 것인데, 이는 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첨에 의해 선출되었다. 마지막으로 재판에서의 배심원인데, 이것 역시 추첨에 의해 선발되었다. 이중 assembly의 실제 운영방식을 살펴보면,
Josiah Ober, 1993, "Public Speech and the Power of the People in Democratic Athens", PS: Political Science & Politics, September: 481-485에 의거해 서술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헌의 기록은 약 150건의 직접민주주의 때 발언한 내용이 전해내려온다. 이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추정해 볼 수있다.
민회는 (시민모임)는 매년 40회정도 모였다. 모임은 7일전에 예고되고, 대개 반나절이 걸렸다. 모든 시민에게 공개된다. 아마도 3만여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개는 6천-8천명이 참석한다. 일찍 온 사람들에게는 하루 일당이 주어진다. 매 모임의 안건은 미리 500명의 시민으로 이루어진 council에서 결정된다. 이들 council 구성원들은 추첨에 의해 연간 복무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들 council은 안건에 대해 추천하는 답을 내놓기도 한다.
집회에는 대개 20-25%정도가 참여하지만, 사실상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사전에 발언하는 사람들이 당일에 예상되는 사람이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참석하기에 특정 계층이 과잉대표되거나 과소대표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당일 회의의 사회는 하루동안만 하게되며, 이는 추첨에 의해 선출된다. 의장은 당일의 안건의 순서를 정하여 공지한다. 만일 안건에 대한 council의 추천이 있다면 공지하고, 의견을 구한다. 누구나 발언할 권리가 있으며, 이때 반대의견, 수정의견, 완전히 새로운 안건으로 제안할 수 있다. 이는 동료 참석원들이 이들의 발언을 들어 주는 한에서 이루어 진다. 구성원들이 발언자의 발언에 대해 지루하면, 소리를 질러 내려오게한다.
발언자들이 모두 발언이 끝나면, 손을 들어 찬반을 묻게 된다. 단순다수결로 결정하고, 이것이 끝나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이런 방식으로 아테네 사람들은 중요한 안건을 결정한다. 외교문제, 세금징수 등. 실제로 이 집회에서 제안되고 채택된 법률안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김봉률, 2011, [어두운 그리스 - 사유와 젠더, 민주정의 기원] (경성대출판부)이 하고있다. 두가지이다. 하나는 이들의 민주주의가 결국은 전쟁을 위한 민주주의였다는 점, 그리고 추첨제에 의한 council구성은 실은 민중의 권력이 선출직 장군에게 옮아가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책을 읽은 것이 아니고, 교수신문에 저자가 쓴 서평을 읽고 옮긴다. “페리클레스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주도했다는 걸 알면서 그 침략전쟁을 치고 나간 주체인 민회가 민주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주정과 추첨제, 토론과 자유가 이 전쟁에 복무하도록 결국 짜여졌다면? ...노예사냥, 약탈, 여성지배, 무역이 목적이었던, 풍요로웠던 고대 아테네를 지배했던 전쟁은 그 자유의 절정이었다...페리클레스 시대 민회는 페르시아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언어, 같은 신화를 지닌 헬라스 도시국가의 자유를 빼앗기 위한 전쟁에 골몰한다"
이에 대해서는 윤리적인 면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실은 전쟁에 인민의 노력(귀족의 군대에서 민중의 군대인 보병, 다양한 계층의 노력이 결합되어야 성공적인 운영이 가능한 해군의 전함 운영)을 동원하고, 재산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관점이 있다. 이에 대해 부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전쟁은 항상 민주주의를 위협하기도 하였고, 발전시키기도 한 역사를 상기하려고 한다. 즉 외부의 위협에 맞서 민주주의는 대개 단일의 전제자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효율적인 국가운영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또한 전쟁은 대중의 호응을 얻고, 희생을 요구하여야 하기에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촉진시킨다는 두가지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만 지적한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를 논한 사람들은 직접 민주주의는 자신들이 의회의 안건만이 아니라, 불확정적인 법의 집행 앞에서 인민들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하기에 인심을 얻기 위해 부를 분배하고, 명예와 덕을 쌓으려고 노력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역사/20세기 2013. 9. 30. 13:41
한계레 21 (979호) 2013. 9. 30일자 pp.32-33에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 실렸다. 이중 기사의 제목으로 나온 "3.15 부정선거는 이기붕 당선을 위한 것?"이란 제목이 실리고, 글이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고 서술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은주 기자는 "실제 3.15부정선거는 이승만을 당선시키기 위한 행위였고, 이승만 당선시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되는 것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좀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관권선거 (마산에서는 경찰이 주요역할, 전국적으로는 자유당과 방계국민운동조직, 반공쳥년단과 같은 깡패조직, 부수적으로 교사, 공무원을 동원), 북한이 당시에 저지른다고 비판한 3, 6, 9인조 집단 내부 감시선거 (투표함에서 기표시, 상호 보여주고 조장에게 확인을 받은 후에 함에 넣는다), 반대자들에게 투표권 주지 않기, 야당참관인 몰아내기, 기자들 취재 금지, 사전 기표하여 투표함에 넣는 것, 반대표 무효표로 만들기, 개표시에 바꿔넣기 등을 자행한 것이다. 이러한 선거 관행은 오랜 기간, 아니 지금도 관권선거개입이 하나의 한국 정치의 관행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최근에 논란이 되는 정보기관의 선거개입 여부에 대한 논쟁도 사실 여기에 기인한다. 당시에도 야당을 지지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아부쳤고, 이번 선거에서 국정원의 심리 전단 소속 직원들의 활동은 주로 여기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즉 반대자에게 빨갱이 낙인을 찍는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 선 자체를 무효선언을 하였고, 이승만은 망명 길을, 이기붕 일가는 가족 모두 자살(장자이자 이승만의 양자가 쏜 권총으로 죽었다), 당시 주동자인 내무부장관과 깡패 조직의 수괴들은 나중에 사형에 처해진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미 꽃을 피우게 된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영국의 한 기자가 한국의 정치를 평하면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을 쓰레기 속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매우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1960년 학생들 (애초에는 고교생들, 후에[ 대학생들 합류, 당시 대학생은 4월 1일에 개학하여 늦게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소생시켰던 것이다.
당시에 이기붕은 이미 만으로 84세에 달하여 일설에 따르면, 50년대 중반부터는 사실상 대통령 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기붕이 장악하였다는 말도 나돈다. 아무튼 이승만은 영웅, 신격화하여, 동상을 세우고, 영화를 만들고, 정자가 세워지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보안법 통과, 경향신문 폐간, 조봉암 사형 등으로 폭압정치로 나아가고 있었다. 위의 문장과 관련하여 분명한 것은 이승만 역시, 당시의 사람들이 평가할 때에도 스스로의 당선을 위해서는 이미 유력 경쟁자인 조병옥이 사망하여 궐위상태이므로, 그렇게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밀어부친 점이다. 당시는 대통령과 부통령선거가 분리되어 있어서, 정은주 기자가 표현한 것처럼, 대통령이 당선되면, 부통령이 자동적으로 당선되는 그런 시스템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의 선거에는 부정이 없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만 부정이 있었다는 것도 틀린 지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승만 정부내에서 부정선거가 기획되었고, 그리고 1960년 만이 아니라, 이미 1960년의 보궐선거나 이전 선거에서도 부정이 자행되었었다. 그리고 자신도 부정선거의 덕으로 4선에 당선된 것이다.
시사 2013. 9. 25. 12:55
시리아 사태의 역사를 탐색해 들어가면, 결국 강대국 정치의 모습이 들어난다. 1차대전을 기점으로 오스민 터키가 망하고, 이를 시리아와 레바논을 불란서가 위임통치하고, 다른 부분 즉 사우디를 포함해 동쪽의 지역을 영국이 지배한다. 이들의 지배 정책은 편의 상 지배이므로, 민족이나, 종교, 언어, 또는 민의와 무관한 행정 편의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충실한 지배 정책을 채택한다. 이때 채택된 정책은 대부분, 종교, 민족, 문화적 균령을 배경으로 상호 분열과 상호대립을 조장하고, 절대로 하나의 세력을 중심으로 통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다. 2차대전후에 레바논은 결국 권력을 3개의 종파가 균점하고, 시리아로부터 떼어낸다. 이는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직접대결의 장으로 변하지 않고,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의 대립을 조장하기 위해 만들어 진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시리아의 대통령은 소수민족 대표이자(인구의 12%정도를 차지), 외부에서는 시아파로 분류되나, 자신의 독자적인 종료를 갖는 종파이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시아파를 이루고 있는 이란과 그리고 이락 남부 지역과 연결된 것을 이해되나 실상은 다른 종파라는 것이다. 이들은 프랑스가 시리아의 군대에 주력으로 키운 세력이다. 소수민족을 군사력의 주력으로 키워놓고 이들인 결국은 시리아 정부를 장악하고 독재정치를 펴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시리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이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사회당 소속이다. 외교전에는 내부적인 이념보다는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우선되는 것 같다. 시리아의 현대통령은 사실상 프랑스의 비호아래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프랑스 정권과 멀리지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아마도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이익도 줄어들지 않았나 싶다. 시리아는 상대적으로 아랍제국 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하고, 따라서 아랍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의 행태를 보면, 아프리카의 사태에도 종종 개입하는 것을 본다. 즉 개별 국가 차원에서 양자간의 차원에서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대개는 식민지 시설 종주국의 입장에서 개입한다. 일본이 오염된 수산물을 한국이 금지시키자, 이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이나 대만에 대해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면서. 아마도 과거 식민지 종주국의 입장에서 손을 보려는 것 같은 인상이다. 프랑스가 현재 아프리카나, 중동지역에 개입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에서, 그리고 이락에서 바로 자신들이 세운 정권에 의해 스스로 공격을 당하고 있듯이. 아마도 시리아에서도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자신의 이익이 민중의 이익과 다를 때 생기는 문제가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불거지고 있는 형국이다.
역사/1900-1919 2013. 9. 11. 17:42
고길희, 2005, [하타다 다카시,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사학자], 지식산업사에는 1908년에 신마산지역에서 태어나 마산 3.1운동을 목격한 진술담이 실려있다. 이는 물론 하타다다카시가 말년에 회고록에 나온 기록을 원용한 것이다.
"소학교 때의 일이다. 하타다 소년은 구마산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오는 길에 신마산 장군천 다리 근방에서 우연히 삼일운동의 독립만세 시위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산에서는 3월 20일, 25일, 30일 즉 5일장이 서는 날을 이용해 시위행진이 있었다. 조선인들이 구마산시장에 집합해 신마산에 있는 府廳과 警察署 등 관청을 향해 행진해 갔다. 일본군대와 경찰은 신마산 입구의 다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작접에 나섰고, 90여명 이상의 조선인을 체포하였다.
하타다는 노년에 당시의 일을 글로 적었다. 그에 따르면 우연히 맞닥뜨린 시위에는 조선 젊은이들은 물론 노인과 어린 여자까지 합세해 만세를 부르짖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겁이 났지만, 그들은 어떠한 가해 행위도 없었고, 다만 귀가를 서둘렀을 뿐이었다. 그때 경찰들이 몰려와 시위대를 둘러싼 뒤 곤봉으로 마구때렸다. 시위가 있은 뒤 수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 구속되었다. 경찰서는 신마산 시가의 변두리에 있었다. 일본 아이들은 경찰서 주변에 모여, 조선인들이 연행되어오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연행되어온 조선인들은 구치소에 다 넣을 수 없게 되자, 경찰은 경찰서 안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 철조망을 치고 그 안에 조선인을 몰아 넣었다. 그걸 본 하타다는 어린 마음에 비가 오면 어떻게 될까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하타다 소년은 조선인이 남녀 모두가 시위하고, 더욱이 자신과 동년배인 아이들까지 시위 행렬에 참가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평소에 아무말도 못하던 조선인들, 특히 노인과 아이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시위대가 자신이나 일본인들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았음에도 경찰이 몰려와 곤봉으로 마구 때리는 모습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42-43).
저자는 마산 3.1운동이 20, 25, 30일에 발생한 것으로기록하였으나,실제로는 21, 26, 31일에 발생한 것으로 자료를 통해 논증되었다 (남부희, 1997, "마산 창원지역의 3.1운동 성격",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15; 김봉렬, 2002, "마산의 3.1운동", 경대사론, 12/13호).
기록에 따르면, 3차례시위가 모두 구마산 정기시장날을 이용하여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타다 다카시가 3차 시위중 어느 시위를 목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체로 3차례 시위에 대해 각각의 격렬성, 폭력성의 정도는 다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차 시위 - "구마산장날 장터는 시위참가자를 비롯하여 장으 ㄹ보려고 나온 인근 지역 주민들로 붐볐다. 시위주동자들은 보부상으로 가장한 김익열에의해 시장에 들여온 태극기를 독립선언서와 함께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들은 정오 경 마산발 삼랑진행 열차의 기적소리를 신호로일제히 태극기를흔들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의 군중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내로진출하였다. 시위행렬이 이어지자 주위의 행인들도 가담하여 시위대는 삽시간에 3천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마산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15천여명이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3천여명은 거의 전 조선인이 참여한 것으로 짐작한다. 평화적 만세시위에 대해 일제는 처음부터 강압적 폭력적 방법의 진압으로 일관하였다. 시위 군중이 가두로 진출하며, 단시간에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자, 마산주재 일본군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총검을 앞세워 시위대를 무차별 탄압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진해 해군 경비대의 군함 조무호를 마산포로 출진시켜 전투태세를 방불케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동인물 50여명이 마산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봉렬, 2002: 182)
2차시위 - "오후 2시경 구마산장터에 모인 군중은 앞서 제 1차 구마산장날 시위에 투옥된 애국지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로 진출하였다. 시위행렬이 북마산파출소를 지나 마산형무소로 나아가며 시위군중은 3천여명으로 극격히 불어났다. 이날의 시위는 구속인사 석방이라는 구체적 요구가 전면에 등장하며, 1차 시위에 비하여, 그 정도가 좀더 격렬해졌다. 일부 과격시위자들은 마산형무소까지 쳐들어가 수감된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외칠정도였다. 시위군중의 확산에 당황한 일제는 경찰을 급파하고, 마산 가포동의 육군 중포병대대 병력까지 긴급 출동시켰다. 무장 군경의 무차별 진압속에 이날 시위에서도 주동자 14명이 체포 연행되었다" (김봉렬, 2002: 183).
3차시위 - "3차의거인 3월 31일, 구마산 일대에서 약 2천여명의 군중이 2시간에 걸쳐 만세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때 일경은 물론 日軍 중포병대대원까지 동원하여 탄압함으로써 이날의 의거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203). 이 기록은 앞선 2차 의거시에도 군까지 동원하였다고 나오므로, 2, 3차 모두 군인이 동원된 것으로 이해된다. "구마산장날 시위에는 약 2,5백여명의 군중들이 참가하였으나, 시위의 정도는 1, 2차에 비해 더욱 격렬해 지고있었다. 시위군중들은 마산 형무소로 진출하여, 애국지사들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를 불렀다. 특히 이날 시위에는 형무소 간수까지 참여하였다. 시위군중의 만세함성에 흥분한 한국인 간수 박광연이 제복을 벗고, 시위대속으로 뛰어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형무소간수까지 시위군중에 합세하자, 시위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만세시위가 절정에 이를 즈음, 진압을 위해 예외없이 무장 일군경이 출동하였다. 이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또 다시 시위군중 20여명을 연행하였다" (김봉렬, 2002: 183-84).
하타다의 기록과 논문들의 기록을 비교하면, 하타다는 형무소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마산 장터에서 신마산의 부청과 경찰서를 향하여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를 장군천 다리에 저지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또한 약 90명이 연행되었다고 하여, 1차의거를 목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2, 3차의거는 주로 1차 의거나, 앞선 의거에서 구속된 인사들을 석방하라는 것이 주요요구중에 하나였고, 2, 3차 의거는 1차 의거에 비해 적은 숫자가 연행되었다고 논문들에서는 기록하고 있기에 그렇다. 또한 하타다의 목격에는 경찰 만이 등장하고 있는 점 또한 경찰과 군인이 동시에 출동한 2, 3차의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하타다는 1차의거를 목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경찰서와 부청은 모두 신마산의 현재 경남대 평생교육원, 경남종합사회복지관 자리, 그리고 그 건너편의 현 파출소로 추정되기에 그렇다.
폭력성에 대해서는 남부희는 적었다고 표현하였고, 김봉렬은 더욱 심해졌다고 표현하나 모두, 1차 시위에서는 격렬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있다. 따라서 하타다 다카시는 1차의 거를 목격한 것으로 판단한다.
역사/1900-1919 2013. 9. 11. 16:23
고길희, 2005, [하타다 다카시,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 사학자], 지식산업에 1910년대의 마산에서 살은 일본인의 체험 기록이 나온다. "하타다 다카시는 1908년 11월 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1921년 마산소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중학교에 입학해 1925년 졸업하기까지 약 17년 동안을 조선에서 생활한 ‘재조일본인 2세’이다" (25).
"개항한 1898년에는 마산 근교를 포함하여 일본인 이민자 수는 103명, 1900년 마산포 사건을 전후하여 3백명으로 증가하고, 러일전쟁 뒤인 1905년이후에는 2천명으로 급증하고, 하타다가 태어난 1908년에는 3,687명에 이르렀다....1912년 당시 마산의 이민자들의 일본 지역 출신지역은, 혼슈(本州)의 야마구치(山口), 히로시마(廣島) 현,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현에 이어 에히메(愛媛) 현과 함께 오카야마 현이 6위로 7백명의 이민자 수를 보여주고 있다 (32). 출처: 朴宗根, 1995, “旗田巍先生と馬山”, 旗田巍先生追悼集刊行會, [追悼 旗田巍先生]: 140-141). 오카야마 현의 사람들은 통영 현재 도남동 관광단지 입구에 이주어촌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준 외, 2007, "경남 통영 강산촌의 형성과정과 주택변용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회계, 23권 8호 (통권 226호), 8월호를 참조하시오.
"1906년에 의사였던 하타다의 부친이 오카야마 현(岡山縣)에서 마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이주 동기는 하타다의 조부가 경영하던 주점 (酒店, 사카야)가 망하자, 조선이란 신천지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하타다의 부친 하타다 가네타로 (旗田兼太郞)가 마산으로 이주했다" (하타다의 누이인 하타다 게이코 旗田惠子의 증언) (31). 1911년 마산에 있던 빈전 신문점이 발행한 [마산과 진해만](일문)에는 마산에 당시 8명의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정도, 2011. 8. 8, 100in.com에 올라온 것). 이때에는 이미 마산병원이 자혜의원으로있었기도 한 시기라서 의사이름도 등장하고 있었다. 즉 김형윤, [마산야화]에 "1909년 신마산 마산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는 마에하라가 철도병원 위탁 산과를 경영했으며, 마산병원 도구가와는 마산병원을 시가의 배로 쳐서 조선 총독부에 기증했다. 마산병원은 경남 자혜병원으로 됐다가, 경남 도립 병원으로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월영초등학교 뒷편, 헌병대장이 살았다던 인근의 언덕 집에 [자혜병원 산부인과]라는 나무 팻말이 쓰러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마산부청이 1915년에 발간한 [마산안대](일문) 책자에는 마산병원이 마산중부 경찰서, 또는 월초등학교 동편 맞은 편으로 추정되어 확인이 필요하다 (조용호, 1999. 1. 25일자 경남신문). 아무튼 중요한 것은 당시에 하타다의 부친은 8명중 한면의 의사로서 근무했으며, 아마도 초기에는 개인 병원에서 근무하다, 후에 마산병원에 근무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 이유로는 마산병원의 역사가 더 밝혀져야하지만, 1908년생인 하타다가 초등학교 중간에 병원이 이전하여 이사하였다는 말이 나오기에 그렇다. 그러면 대강 1915-20년 사이로 추정된다.
"하카다의 생가는 일본인 거리가 급속히 발전한 러시아 영사관 동쪽 마산천 주변, 즉 일본인 거리와 조선인 거리의 경계에 있었다 (마산천은 현재 창원천이라 불리우는 제일각 옆, 제일여고의 연애 다리가 있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일본인과 조선인 거리의 경계라는 표현은 잘못,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근처는 본정으로 불리우던 곳이다 – 이은진 지적). 그곳에 살다가 하타다가 소학교 저학년이었을 무렵 (1915년경으로 추정, 이은진 추가), 그의 일가는 일본인 거리로부터 약 4-5킬러미터 떨어진 동쪽 지역으로 이사했다 (마산역까지는 직선 거리 6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걸어서 거리라고 하더라도 1킬로 미터 미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 이은진 추가). 1905년 일본이 군사목적으로 마산선 철로를 부설하였는데, 마산역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당시 일본인 거리가 러시아 영사관 주변 (현재의 월포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에서부터 점차 동쪽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집 주변에는 일본인 소학교 (월영 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와 관공서 (마산우체국, 이은진 추가)도 있었다. 그 속에서 하타다의 집도 醫院 건물을 세워 조금씩 넓혀 갔다" (35). 앞서 조용호 기자의 글에는 인근에 창원 군청이 있었고, 장군동에 검찰과 법원이 있었다.
34쪽에 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거리 사진이 게재 => 멀리 보이는 공장은 주류 공장 (창포 동성, 창포 한백 아파트로 추정, 그러나 사진 도로가 구부러진 방향이 현재의 도로 방향과 달라서 후에 허정도에게 문의해보아야 할 사항... 이은진 추가).
책을 읽다가 흥미로와서 적어 보았다. 최근에는 일제하 조선에 살던 일본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다. 필자의 메모에 성신대 김주희 교수가 쓴 박사학위 논문에 마산 가포지역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생활을 일본신문에서 기사화 한 것을 인용하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한번 문의해 보아야겠다. 오늘 성신대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니 주소가 불명하다. 혹시 아시는 분은 댓글을 달아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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