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교환을 통한 의사소통

시사 2012. 4. 13. 15:19

경남도에서는 매월, 도지사 주재로 조회를 하고, 이날 직원들과 도지사가 서로 상대방에게 독서를 권하는 책을 주고 받는다.  지난 4월 1일에 주고 받은 책은 직원들이 도지사에게 신영복 선생이 중국 고전을 읽고 해설한 책 [강의]를 권하였고, 도지사는 도청 직원들에게 에릭 라이너트라는 경제학자가 쓴, [부자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를 권하였다.


책을 주고 받는 것은 내가 감명깊게 읽은 것을 상대방에게 권한다는 단순한 의미도 있지만, 도지사와 직원 사이의 권유하는 책의 교환은 단순한 책의 교환이라기 보다는 의사소통의 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친구에게 책을 선물할 때, 내가 평상시에 하지 못한 말을 책을 통해서 하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깊이있는 대화는 오히려 책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생각이 담긴 책을 통해 생각의 깊이를 알 수 있듯이, 깊이있는 대화는 책을 통하는 것이 가능할 경우가 많다.  이를 감안한다면, 왜 직원들은 도지사에게, 중국 고전을 해설한 [강의]를 권유하여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 하였을까?  도지사는 [부자나라...] 책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직원들에게 전하려 하였을까?


신영복의 [강의]는 중국 주나라 이전 시기부터 시작하여, 한나라시기까지에 정리된 고전들을 해설하여 엮은 책이다.  평이하면서도 당시의 시대상황, 시대상황에 대응하는 통치술에 대한 것을 현대에 맞게 서술한 것이다.  물론 당시라는 것은 BC 2천년전부터, BC 2백년전에 해당하는 시기이므로, 국가체제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이다.  국가의 억압성이 드러나고, 지배체제가 확립되면서, 공동체적 질서가 와해되던 시기이다.  이때 주로 민본주의 관점에서 사회질서의 재편을 꾀하던 시기이다.  물론 법가에 이르르면, 법치주의를 토대로 민을 억압하려는 모양이 다시 취해지기는 하지만, 아무튼 공동체적 질서와 와해 속에서 사회적인 지배질서를 재편성하던 시기인 것 만큼은 사실이다.  도청의 직원들은 도지사에게 민본주의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도지사는 직원들에게 에릭 라이너트의 [부자나라는...]을 권유하였다.  이 책은 비교우위설을 비판하고, 내재적인 성장동력인 기업가의 혁신정신, 기술개발을 강조하면서 경제 발전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내부 혁신적인 관점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최근에 미국에서도 금융자본의 폐해가 드러나면서, 제조업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독일이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의 성장을 통해 국제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현상을 인지하고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현재 FTA를 통해 국제적인 개방을 추구하고 있고, 해외자본의 유출입이 격심한 점, 외환 변동에 따라 국내 경기의 격변이 일어나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방향으로 경제발전의 전략을 취해야하는가를 생각게 하는 저서이다.  아마도 도지사는 직원들에게 외부의 변화나 개방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경제발전의 정책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책을 통한 도지사와 직원간의 대화는 더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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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1820, 通塞議

교양 2012. 4. 3. 11:40

통색은 벼슬길이 막혀 있던 것을 트이게 한다는 뜻이다(다산논총, 1976, 을유문화사: 219).  통색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신이 엎드려서 삼가 생각컨데, 인재를 얻기가 어렵게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온 나라의 인재를 다뽑아 올려도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되인데, 하물며 그 열가운데 여덟 아홉은 버리는 것입니까?  온 나라의 백성을 다 모아 培養하여도 오히려 振興시키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 열 가운데 여덟 아홉은 내쳐 버리는 것입니까?"

지난 4월 1일자 중앙일보에 미 행정학회보 편집장 제임스 페리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미국은 인구가 3억 8천만이어서 인구선택의 폭이 넓다.  내가 연세대에서 3학기 동안 강의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은 흑백논리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거다.  진보냐 보수냐 우리편이냐 아니냐 편가르기가 심하다.  사람 쓰는 폭이 더 좁아질 수 밖에 없다".

한국사는 아직도 다산의 고민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소수의 귀족정치로 남아 있느냐, 아니면 민주주의 원래 모습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모양이다.  민주공화정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우민 정치가 아닌, 대중이 집단 지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치체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즉 대중이 선거에 임해서는 후보자를 잘 알고, 정책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물, 평상시의 인품이나 사회관계를 보고 뽑을 수 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현재의 상황보다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관문이 바로 민주공화정의 확립이다.  그래야 숨은 인재가 발굴되고, 국민들이 더 노력하는 사회가 되어, 사회 전체적으로 활력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교육이 상승이동의 통로가 되고,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고, 사회정치적으로 표현과 사업기회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활력이 살아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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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지 않은자들이 일어날 때 역사는 이루어 진다.

역사 2011. 12. 6. 10:58
어제 저녁, 창원 웨딩의 전당 부페에서, 부마항쟁기념사업회에서 엮은, [부마항쟁 증언집: 마산편, 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이 책은 800페이지 분량으로 40분의 증언이 실려 있다.  개인당 20여페이지 이므로, 200자 원고지로 130여매, 아마도 인터뷰 분량으로는 2시간정도씩 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노작이다.  필자는 이 책의 서평을 10분간 발표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2008년에 군사재판 기록을 기반으로 책을 낸 것이 인연이 된 셈이다.
부마 민주항쟁은 한국 기독교인권위회의 1987년 책자에서(1762쪽)도, "역사에 튼 영향을 난ㅁ겼으면서도, 그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79년 10월 18-20일의 마산항쟁은 아직도 밝히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많다.  특히 국가 기관에 종사하면서 가해에 가담하였거나, 사적인 사정 또는 아직도 이를 드러내어 밝히면 불이익을 당한다고 믿고 있는 피해의식에 의해 밝히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이러한 분위기를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간 1985년에 신동아와 월간조선에, 1988년에 한겨레 신문에 기사화되었다. 
그러나 1989년 10주년을 맞이하여, 15명의 증언과 남부희 기자의 취재기록이 발간되었다.  당시 언론의 취재기록은 남부희(신문), 신용수(방송)에 의해 보존이 되었고, 민간기록자인 박영주의 도움이 컸다.  박영주는 1989년의 증언을 채취하는 데에도 가장 노력을 많이 기울인 사람이다.  그러나 당시에 검거된 505명, 마산시민 38만명의 숫자에 비하면, 시위에 참여하였거나, 마산에 거주하면서 이를 체험한 사람들의 숫자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었다.

마산의 한적한 공원에 기념비도 설립되었으나,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다행히 2005년에 민주화 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가 시작되면서, 공식적으로 등록하려는 용기를 일부가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도 학생이나, 언론인들이 주로 신청하였고, 당시에 노동자나 자영업자, 일반시민, 자유노동자 출신으로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이런 제도적인 혜택에 근접하지 못했다.  2006년에 다른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한 단체에서 마산시위에 관한 육군고등군법회의 자료를 발굴하여, 이를 기반으로 필자가 2008년에 책자를 발간하였다.  당시에 두가지 사항은 여전히 밝히지 못했다.  즉 사제총 발견건(당시 필자는 책에서 북마산파출소를 지목하였으나, 어제 증언자들은 남성파출소로 추정하면 발표를 하였다고 진술), 변시체 발견 건이었다. 변시체발견은 최근에 사실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고, 남부희 기자의 취재 수첩이 경찰 정보에 의거한 것이므로, 상당히 정확하다는 점을 확인하여 주었다.  공화당사 앞에서 시위 첫날 18일 오후 6시 30분-7시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므로,시위 초기부터 경찰은 강압적으로 진압에 임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집 진압 경찰의 증언에서도 경찰은 이미 시위 훨씬 전에 진압훈련을 행하였고, 마산에 추가 배치를 완료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마산도 역시 시위 발생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006년에 차성환은 박사논문을 집필하면서, 증언을 받았는데, 이때 한 노동자의 증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재판 기록에는 경찰에서 방화시인, 검찰과 재판과정에서 고문으로 허위시인을 한것으로 진술하면서 방화 부인, 그리고 2006년 증언에서는 방화 시인, 그리고 어제 증언에서는 더 많은 방화에 대해 시인, 그리고 방화하면서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증언하였다.  자료의 신빙성, 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진술의 정직성 등을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증언집에는 피살자 가족 1분, 재판회부자 9명, 피체포자 6명, 참여자 12명, 촉매자 역할을 담당한 신부님, 다방 dj, Y회장, 외부의 지도자  등 4명, 기록자의 역할을 한 언론이 2명, 진압자에 해당하는 경찰과 공무원, 학생들의 교수 등 6명의 증언이 실려 있다.

전반적으로 마산의 사회적 연결망, 외부사상의 이입경로, 등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방적이고 활발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증언에 빠져 있다.  민중은 말로 증언하지 않고, 행동으로만 보여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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